brunch

매거진 탐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소연 Aug 03. 2024

[미국소설 비평] 『리틀 라이프』

울리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는 착각 ★★★

작품을 읽은 후 작가 이름을 검색한다. ‘한야’라는 이름이 내 직관과 달리 여성이 아닐 수도 있으니. 

사실 아니길 바랐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검색 결과는 기대를 저 버렸고 『리틀 라이프』의 작가는 아시아계 여성임을 확인한다. 


물론 여성이 남성의 이야기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남성 등장인물들을 배제한 채 여성의 목소리만을 포착하려는 시도도 많으니 그런 측면에서 이 소설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주요 캐릭터들이 남성이라는 설정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정과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모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얼마나 꿋꿋한지를 보여주는 낭만화 된 자리에 여성들은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건(이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는 젊은이들 사이에 여성이 설자리가 없다니!) 역시 좀 불편한데다 대단히 시대착오적이다. 여성의 권익이 부러라도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 시대에 남성들만 중심이 되는 세상을 다룬 이 작품이 무려 2015년에 쓰였다는 것, 그리고 (2019년에는 마거릿 애트우드페미니즘 소재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를 선정했던) 부커 상에 이 작품이 최종 후보이기도 했다는 것,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2015년이 그렇게 먼 과거였던가. 


화려한 감정 마케팅, 의도된 오류

잠재적 독자를 사로잡은 『리틀 라이프』의 마케팅은 실로 대단히 강력했다. 그 시작이 원래 출판사인 Doubleday Books의 고도의 전략인지는 모르겠으나 『리틀 라이프』를 읽으며 ‘통곡하는’ 리액션 숏폼 영상은 미국 전역에 바이럴 되었고 작품 자체를 역주행 차트에 올려놓았다. 한국에 이 소설을 소개한 출판사인 시공사도 <리틀 라이프 챌린지>라는 타이틀로 ‘책 읽으며 울지 않기’라는 미션을 제공했고 미국에서 유행했던 숏폼을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활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고 나 또한 그런 독자 중 하나로 지금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리틀 라이프』의 마케팅은 즉각적으로 엄청난 반응을 몰고 왔다. 아마 세일즈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작품이 취향이건 아니건, 유용성의 측면에서 존재 자체가 의문시되는 문학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이라도 느껴야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일면 그런 고마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화려한 마케팅에는 어딘가 좀 기만적인 측면이 있다는 찝찝함도 떨칠 수 없다. 책을 홍보하는 숏폼 영상은 나도 모르게 ‘많이 울리는 작품=감동을 주는 작품=좋은 작품’이라는 오류를 범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책의 구매까지는 이어지게 했지만(하지만 출판시장에서 그게 전부가 아닌가), 작품을 읽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이야기할 만한 콘텐츠로는 자리 잡지 못할 것 같다는 예측을 하게 만든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낚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책이 날 울리지 못해서는 아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도 여럿이었고 확실히 감정의 파동이 큰 작품이라는 데는 완벽하게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1,000페이지에 걸쳐서 전시되고 있는 끔찍한 학대와 고통의 묘사는 『리틀 라이프』가 과연 무엇을 위한 소설인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은 건지 모호하기만 하다. 물론 방대한 양의 고통 묘사 자체가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주드가 당한 고통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한 현실의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을 것이고 문학은 이를 알리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틀 라이프』는 알리는 것을 넘어 전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참상들을 사진으로 '감상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리틀 라이프』에는 한 개인의 고통을 글로 촘촘하게 구경하고 있는 느낌. 그 고통은 그 안에서 결코 내 것이 되지 못했고 타인의 이야기로만 남는다. 


눈물과 연민이 가진 위험성

그렇다고 하여 이 작품에 대해 이다지도 박하게 굴 필요가 있을까? 어쨌거나 독자들은 감정의 전율을 경험했고 그것으로 그들이 얻어 가는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 눈물과 연민의 감정, 특히 타인의 고통을 보고 느끼는 그런 감정에는 함정이 존재한다. 울고 나면 우리는 울었다는 사실 때문에, 주인공의 고통에 동화된 자신에 대한 기특함 때문에, 작품이 훌륭하다는 착각 내지는 나 자신이 훌륭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 당연히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감정의 폭풍우가 쓸고 간 자리에 찾아온 고요, 나의 내면은 그 슬픔으로 인해 '정화'가 되는데 그 정화는 타인의 고통을 딛고 서있다. 책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다. 캐릭터와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며 나처럼 걸어다니고 밥을 먹고 하루를 살아낸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나는 울었고, 나는 공감했고, 그랬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나면 마치 이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감당해 낸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거기에 좋은 책 하나 완독했다는 자아도취적 성취감마저 든다면, 정말이지 최악이다. 


재난과 같은 소재를 다룰 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어쨌거나 작가는 자신이 쓴 글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가 '커트 보니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드레스덴의 학살'을 다룬 『제5도살장』를 거론하며 그 전쟁으로 이득을 얻은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그 유일한 단 한 사람은, 바로 자신. 드레스덴의 이야기로 글을 써 인세를 벌어먹었다는 논리에서다. 이 자조 섞인 유머 속에 작가는 자신이 다루는 참상이 어떤 식으로 의미를 가지게 될지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제로 『제5도살장』에서 "대학살에 관해서는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지요. 원래 모두가 죽었어야 하는 거고, 어떤 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다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거지요. 원래 대학살 뒤에는 모든 것이 아주 고요해야 하는 거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새만 빼면(pp.33)"라고 한  것처럼, 비극을 다루는 데는 침묵만큼 정교한 세심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세심함은 단지 눈앞에 펼쳐지는 학대의 고통에 대한 세밀한 묘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드에게 닥쳤던 시련은 재난과 대학살과는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고통이 재난을 당한 개인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고통이 스펙터클로 소비되어서도, 과잉의 감정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쓰여서도 안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연 『리틀 라이프』가 안전지대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의 연속 속에 작가는 주드를 던져 넣고 그를 결코 구원하지 않는다. 나아졌다는 안도감 뒤에 언제나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 행복 뒤에는 언제나 불행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불안감. 이것이 인생이라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에서 한 장면이 생각났다. 일본의 작가인 료헤이가 자신의 팬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료헤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인공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잔인하다고.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왜 당신은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주지 않나요?"


많이 울리는 작품은 그저 많이 울리는 작품일뿐

이런 감상을 밝히기가 조심스럽다. 왠지 이 작품이 싫다고 말하면 주인공 주드가 겪은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든다. 이런 고통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말 같아서. 혹시 나의 무심함과 방임적 태도를 나무라는 것에 대한 방어기제는 아닐까. 하지만 역시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연을 쫓는 소년』을 좋아한다. 모두 학대받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또 어떤 슬픈 소설은 울지 않았어도 슬펐고 훌륭했다. 너무 좋아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헤리트 뮐러의 『숨그네』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눈물 흘리지 않고도 좋은 줄 알았다. 고통이 처절하게 느껴졌지만 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강압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해 보자. 많이 울리는 작품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데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많이 울리는 작품은 단지, 많이 울리는 작품일 뿐이다. 


덧. 

네이버에 들어가  『리틀 라이프』의 평점을 확인한다. 4.87점이다. 참고로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4.71점.(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 중 하나인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5.0점이라는 것)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싶어 리뷰를 클릭해 보니 내용에 대한 리뷰보다는 배송 상태라느니 기대된다느니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 이건 책 리뷰가 아니라 책 배송 리뷰가 더 정확한 표현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움의 발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