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를 살아가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필로소픽. 2016. 96p. 9,000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2017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가 취임식을 갖고 미합중국 45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트럼프의 시대의 시작이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선거에서 힐러리를 물리친 트럼프의 주요 전략은 '개소리'다. 개소리란 팩트에 괘념치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으로, “주한미군이 공짜로 한국을 지켜준다”, "9/11 테러 당시 뉴저지의 수많은 무슬림들이 환호했다", "백인 살인 피해자 81%가 흑인에게 살해당했다" 등 트럼프가 뱉은 개소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해서 나는 '트럼프 시대의 시작 = 개소리 시대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 취임 이틀 만에 신호탄이 터졌다. 자신들의 취임식에 오바마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왔다는 트럼프 측의 구라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으로 밝혀지자, 백악관 선임고문 캘리언 콘웨이가 거짓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제공한 것뿐이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시전한 것이다.
트럼프의 사례에서 보듯, 팩트와 논리를 이미지로 뭉게 버리는 개소리의 힘은 어마 무시하다. 한국 또한 이러한 개소리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여러 채널로 밝혀지고 있는 지금, 개소리를 집대성한 이 책을 집었다.
1. 참으로 도발적인 제목이다. 이렇게 호방하게 질러주는 제목이라면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원제는 ON BULLSHIT. 원제의 의미를 충실하게 살린 번역이다. '헛소리에 대하여' 혹은 '뻘소리에 대하여' 였다면 지금과 같은 임팩트는 없었을 테다. 제목으로 반은 먹고 들어간다.
2. 개소리는 ~~다, 라고 깔끔하게 정의내리지 않은 점은 아쉬우나,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인 거짓말과 비교하며 의미를 구체화시켜 나가는 과정은 좋았다. 예컨대, 개소리와 거짓말 모두 부정확한 진술을 뜻하나 진실의 반대로서 거짓말과 달리 개소리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부분.
3. 위 논의를 전진시켜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위험한 이유 4가지를 제시하는데,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통찰이자, 핵심이라 생각한다.
a.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리든 거짓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b. 공들여 만들 필요가 없으므로 거짓말보다 편리하다.
c. 거짓말은 거짓임이 들통나면 커다란 비난이 쏟아지지만, 개소리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푼다.
d. 개소리는 강력하다.
4. 다만 마무리가 다소 급한 것 같은 찝찝함은 버릴 수 없다. 기왕 진단과 문제제기를 한 김에 대안까지 나아가면 좋았을 것을. 만연한 개소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까지 알려주면 좋지 않나. 그나마 다행인 건, 책 말미에 '옮긴이의 글'이 상당히 친절하게 책 내용을 정리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이 다룬 이론의 영역을 현실의 언어로 해설했다고 할까.
5.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내용이나, 손바닥만 한 크기(100x150mm)에 96페이지밖에 안 되는 미니북을 하드커버로 만들어 9,000원에 팔아야 했었나에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논문 한 편 분량의 글에 메기기에는 비싼 가격이다. 구글링으로 공개된 원문 PDF를 찾을 수 있고, 유튜브에 저자 강연도 있으니 그쪽을 적극 활용하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