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사실과 법칙에 관하여
'그게 정말 사실이냐’라는 질문은 무엇을 의미할까? 보통은 모두가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실제 속에서 그 일이 벌어졌냐는 뜻을 내포하고 있을 테다. 특정한 인간의 시선과 해석에 영향을 받지 않은 객관의 차원에 대해서만 말해달라는 의도 역시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때, 의문이 한 가지 남는다. 정말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불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경험한 일들이 어떻게 갑자기 보편과 객관의 층위에 올라설 수 있는 걸까?
관점과 언어 기술이 크게 개입하는 사회과학적 이슈와 달리, 수학적 경험에 의지하는 사실들은 논란 없이 객관의 범주에 포섭되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은 정말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우리가 믿고 있는 과학적 사실 몇 가지를 조금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에 대한 답은 NO라고 외칠 수 있다. 제주도 해안선의 길이, 혹은 여러 국토의 크기는 구글 검색을 통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수치는 과연 인간이나 인간에 의해 개발된 측정 도구로부터 자유로이 존재하는가? 해안선의 길이는 정밀한 측정 기준을 들이대면 댈수록 조금씩 달라진다. 물이 1기압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 역시 인간이 설정한 여러 기준들에 터해서만 사실이며, 놀랍게도 이 사실과 관련해서 확실히 검증된 바는 없다. 전지의 기전력이 ‘사실’ 금속의 접촉에서 기인하는지 금속과 특정 매질 사이에서 기인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바가 없다.
객관으로서의 사실에 대한 기대는 접더라도, 세계가 작동하는 보편원리라 여겨지는 ‘법칙’만은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케플러 법칙, 갈릴레오의 관성의 법칙 등은 분명 모든 자연현상과 모든 인간에게 참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급한 법칙들의 경우, 자연의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오로지 수학을 통해 기술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이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라 믿어온 대부분의 법칙들 또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인간이 관찰하고자 했던 부분에 대해서만 설명을 제공하는 수학적 근사(approximation)에 불과하다. 케플러 법칙에서는 행성의 궤도를 타원형태라 가정하지만, 실제 행성의 궤도—이 실제도 인간의 관측에 의존하지만—는 완벽한 타원을 그리지 않는다. 관성의 법칙 역시 마찰력이 작용하지 않는 공간에서 혼자만 존재하는 물체에 대해서만 성립하는데, 그런 물체는 없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1”
과학의 역사에 기록된 많은 논쟁은 결국 과학에서 사용되는 사실과 법칙들이 인간의 관점과 독립적이지 않기에 일어났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논쟁의 해결 역시 어느 하나가 완전한 진리로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던 두 이론이 자연을 설명해내는데 상보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자연을 더 많이, 더 잘 설명해내는 법칙을 ‘창조하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인 것이다. 예컨대,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운동-공간의 관계에 대한 이론, 다윈의 진화론과 라마르크의 진화론, 양자물리학 분야에서는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함수 방정식이 각각 치열하게 대립하던 가운데 결국 자연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식으로 결합해버렸다.
보편 법칙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제시하는 상기된 사례들은 과학만 한 절대 진리가 어디 있냐고 외쳤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가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로써 인간과 독립적이며 불변하는 보편 법칙과 사실의 존재 여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인간이 과학을 하는 이유가 ‘인간으로서’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기 때문일 테다. 실제로 물의 화학적 특성이나 기전력의 기원을 정확히 몰라도 과학자들이 각종 연구를 하고 세상을 바꾸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왔다. 또한, 세계의 복잡성을 걷어 내고 특정 변수에만 집중할 경우, 즉, 근사 처리해서 볼 경우,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과학에서는 법칙에 내재한 불완전함이 아니라 그 유용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 더 유의미하다. 객관적 진리와 자연법칙의 존재 여부를 따지는 것도 의미 있지만, 이 논쟁에 천착하느라 법칙과 사실을 활용하여 세계를 변화시키고 해석할 수 있는 세계의 폭을 넓히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애초에 우리는 인간의 신체와 인간의 의식 수준에서만 법칙의 논리성과 보편성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를 단순화하는 것은 정말 유용함만 가져다주는가? 특정한 단면이나 현상만을 떼어내어 보는 관찰법이 야기하는 부작용은 없는가?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다층적 현상을 의도적으로 해체하여 연구하고 이를 정책에 도입한 후에 기존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일부를 조각 케이크 자르듯 잘라내어 분석하고, 그 조각에만 해당하는 이론을 만들어내니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과학 분야는 자연을 단순화하고 길들여서 실험실로 데려오는 것이 필연적이고, 완성된 결과물을 실험실 밖으로 다시 꺼내도 상대적으로 많은 현상에 일괄 적용이 용이해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과학에서는 ‘잘라낸 조각 케이크에 대해서만 연구한 결과’가 부작용을 일으킨 사례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분야에 따라 그 비중이 다르다면, 물리학 분야보다는 생물학 분야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날까?
또한, 사회과학계에서도 마르크시즘이나 지식경제 사회처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가장 폭넓게 설명한다 여겨지고, 가장 많은 이들—그것이 인간 행위자이든 비인간 행위자이든—을 번역할 수 있는 이론이 주류 이론으로 자리잡기는 한다. 그러나 보편 법칙의 수준에 이르는 이론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학에서 법칙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과학만이 수학이나 물리주의(physicalism)에 입각하여 절대다수에게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인 걸까?
[1] 홍성욱,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동아시아, 2016, p.246.
*수업 제출용 에세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