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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Jun 03. 2024

청소년 포토그래퍼가 되다

만났을 때, 사진을 많이 찍어주는 친구는 참 고맙다. 사진을 잘 찍어준다는 건, 빛나는 재능이다. 누군가 알아서 나의 모습을 담아 주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아이와 함께 있는 순간을 영화처럼 찍어주는 남편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내 사진첩에는 꽃, 음식, 아이사진, 남편 사진이 가득하지만 정작 내 사진은 별로 없다. 가끔 찍은 셀카 사진이 전부다. 과거의 사진들을 들춰보면 그때 잔뜩 찍었던 음식사진, 꽃 사진보다 젊었던 내 사진에 눈길이 갔다. 지금보다 빛나고 젊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그 순간을 기록해 줄 사람이 없으니 가끔 씁쓸했다. 지금이 가장 젊은 날, 젊은 날의 사진을 많이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주말의 오후, 우리 가족은 시어머님과 점심을 먹고 나들이에 나섰다. 6월은 초록 스웨터를 입은 듯, 곳곳에 생기가 넘쳤다. 맑은 하늘까지 합류하면 무릉도원이 되었다. 드라이브 겸, 카페를 찾아가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 아까 거기서 빠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왼쪽으로 장욱진 미술관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 장욱진 미술관이 시댁 근처에 있어서  가고 싶었지만, 나만 미술관을 좋아하기에 시댁 모임이 있을 때, 가족들에게 가자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그날, 운명처럼 미술관 옆을 지나게 되었다.

남편이 먼저, 미술관에 가자고 제안했다.


목표를 정하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응했다. 어머님, 남편, 나, 아이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sns에서 자주 봐왔지만 실제로 가 본 적은 없었기에 기대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공원 곳곳에 조각들이 놓여 있고, 맑은 냇물도 흘렀다. 미술관인지, 유원지인지 헷갈릴 만큼 오묘했다. 미술관 안 공원의 평상에 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잔디에 돗자리를 펴고 커피를 마시는 가족도 있었다. 냇물에서 물장구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평온한 오후의 풍경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장욱진 시립미술관의 조각들

길을 따라 걷자 풍선 곰돌이 조각, 가족의 포옹 조각, 다이빙하듯 높은 곳에 기울어진 조각, 강아지 모양의 의자, 발가락 조각 등이 펼쳐졌다. 걸음마다 다음 걸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문득 영국의 리젠트 파크가 떠올랐다. 몇 년 전 방문한 런던의 리젠트 파크에도 조각들이 많았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적인 공간에 있는 작품을 보며 대중들의 미감을 키우는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한국에도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걸 장욱진 미술관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함께 간 아이는 미술관보다는 노래방을 더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나와 자주 미술관을 갔지만, 청소년이 되어서는 미술관 가는 것을 싫어했다. 어쩌다 미술관에 가면 그림보다는 밖의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즐겨했다. 변화된 청소년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 미술관은 나 혼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처음 간 미술관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간 나들이었기에 아이는 반대의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


“린이 너 미술관 안 좋아하잖아? 여기 공원 있으니까 보다가 밖에 나와 있어도 돼.” 당부했다.

미술관이 아름다워서 아이에게 엄마 사진 좀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시크하게 몇 장을 찍어주었다. 찍어 준 사진을 보니 마음에 드는 사진은 없었다. 제안 하나를 했다. (남편보다는 딸이 사진을 더 잘 찍었기에 아이에게 제안했다.)

“네가 오늘, 엄마 사진을 잘 찍어주면,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당, 천 원을 지불할게. 오늘 하루, 프로페셔널한 포토그래퍼가 되는 거 어때?”

“한 장에 천 원? 괜찮은데…. 오케이 알았어.”

흥미 없던 아이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상식에 온 여배우를 찍듯 쉬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이런 식으로 찍으면 돼?”

라며 내게 사진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묻기도 했다.

“좋은데, 하늘이 많이 나오도록 찍어줘.”

“알았어. 엄마 여기 서봐.”

“저기 계단 앞에 서봐.”

“저 조각상이랑 같이 찍으면 잘 나올 것 같아.”

“엄마 옆모습이 나오게 고개를 돌려봐.”

“다리도 쭉 빼보고.”

평소 내 사진 찍을 때, 보여준 적 없는 열정이었다. 마치 웨딩사진을 찍듯 아이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포즈를 제안했다. 아빠와 할머니 사진은 찍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의뢰인은 나였기에, 클라이언트가 만족할만한 사진을 찍기 위해 집중했다. 목표가 명확했다. 나의 깜짝 제안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지 미처 알지 못했다. 만약 포토그래퍼를 제안하지 않았다면 아이는 미술관(가족) 나들이를 심심해했을 것이다.


가족과 자연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은 장욱진의 작품도 좋았지만, 아이가 열정을 다해 무릎까지 꿇으며 찍어준 사진들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나는 총 5장의 인생 사진을 건졌고, 아이는 5천 원을 벌고 미소 지었다.



이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엄마 좋고 딸 좋고 아니겠는가?

서로가 흡족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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