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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따가 May 03. 2020

메모를 또 속냐!

무언가를 시작하는 바람직한 방법

우리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방법은 '장비 세팅'이다. 혹시 수영이라도 시작할 생각인가? 새 수영복은 필수다. 노출이 적어 덜 민망하면서도, 너무 화려하지 않지만 개성을 은근히 드러낼 수 있는 '꾸안꾸' 수영복을 찾아야 한다. 수영복에 딸려있는 수영 가방은 일회용 비닐봉지처럼 생겼을 테니, 건조도 편리하고 컬러풀해서 눈에 잘 뜨이는 수영가방이 필요하다. 수영장 물에 고생한 나의 피부를 위해, 핸디형 수분크림 하나쯤 넣어준다면 완벽하겠다. 이 정도 되었으면 아직 수영은 시작도 안 했으면서 마치 접영 정도는 껌인 듯한 자신감에 충만할 수 있다.


내가 투자한 만큼이 열정의 크기인 양. 내가 산 물건들로 내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우리는 새로 산 물건들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소비'와 함께 시작하는 새로운 일은 즐겁다. 소비하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바람직한 인간상이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우라를 손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어쩌면 새로운 물건을 사면서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찾으려 애쓰는지도 모른다.

 

작년에 산 몰스킨 노트. 처음엔 열심히 썼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꿈과 희망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일을 위해 물건을 장만해두어도 이내 장식품이나 애물단지 정도로 전락하기가 일쑤다. 내게는 매년 단골손님처럼 찾아오는 꿈과 희망이 있다. 바로 '메모하기'다. 자기 계발서나 글쓰기 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모하기. 매년 시도하시만 빈틈 많은 나에게는 너무 큰 도전이었을까. 작년에는 헤밍웨이도 썼다는 '몰스킨' 노트를 민트색으로 장만했지만, 고작 삼분의 일 정도 썼다. 매번 가지고 다니기가 무겁다는 둥, 역시 메모는 나와 맞지 않으니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둥 하다가 여름이 다가올 즈음부터는 책장 구석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다.


올해는 글쓰기를 잘하고 싶어 다시 한번 메모를 다짐한다. 촌철살인의 문장들을 모아 독자들을 홀려야 하겠다는 욕망을 실현하려면, 글감을 모으고 문장을 모아야만 한다. 글쟁이의 첫걸음은 메모라고 하니, 올해야말로 메모하기를 성공할 때가 왔다. 물론 작년의 실수에서 배운 것이 있기에 올해는 가벼운 메모지를 하나 사기로 했다. 메모지를 고르다가 눈에 책 한 권이 들어온다. 책 제목은 <아무튼, 메모> 메모를 시작하겠다는데 책을 또 안 살 수가 없지. 체계적으로 메모를 성공시키려면 메모 관련 책도 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작가 좀 이상하다. 제목이 '아무튼, 메모'인데, 작가가 메모를 하지 않는다고?! 다음은 <아무튼 메모> 중 한 대목이다.



친구는 또 이렇게 말했다, 
"진실하지 않은 책이 나올 것 같다."
"왜?"
"너 메모 안 하잖아. 메모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차라리 '아무튼, 실수' 어때?"


첫 챕터만 읽고 정혜윤 작가에게 반해버렸다.


<아무튼 메모>의 저자는 메모장을 항상 곁에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 사랑할만한 순간이 오면 혹시 잊어버릴까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해두었다가. 밤이 되고, 혼자가 되었을 때 꺼내서 그제야 메모를 시도한다. 그렇다고 기억력이 뛰어난 것 같지도 않다. 나라면 일기라고 불렀을만한 글쓰기다. 


낮 동안 비메모주의자로 살았던 나는 혼자가 되기를 기다린다. ...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고통이 싫지 않다. 내가 중요한 것을 잊었음을 무난하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껴서 좋다. 그래서 나의 하루를 심문한다 그때부터가 중요하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 그 이야기의 시작이 뭐지? 그 이야기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왜 좋았어?' 이렇게.



평소 결정적 순간에 핸드폰 카메라부터 들이미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기에, 작가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메모를 꼭 그때그때 해야 할 건 또 뭔가. 나의 소중한 시간들이 방해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쓰는 것과 관계없이 나를 위해 적어두는 짤막한 글이라면 모두 메모인 것을. 나는 메모하고 싶다는 기분만으로 메모를 대했던 것이 아닐까. 방금 산 메모지가 부끄러워진다.  


<아무튼, 메모>에 따르면, 아무튼 난 글쓰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메모를 하고 있었다.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아이디어와 초고를 적어두고서 이번 주는 어떤 글을 쓸까, 혹은 글이 막히면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나 떠올리기 위해 '작가의 서랍'을 뒤적인다. 훌륭한 메모라 할 만하다.


브런치 서랍은 좋은 메모장이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바람직한 방법은 '내가 시작한 줄도 모르게 시작하기'일 거다. 요란 떨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하겠다는 오두방정 없이 그저 쓰는 무던함. 아아.. 이것이 바로 어른의 멋짐인가. 몇 년째 글을 쓰는 작가분들의 꾸준함이 부럽다. 새로운 것들이 너무 많아 새로움이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요즘이다. 이런 날은 시작하기보단 꾸준히 하기가 더 멋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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