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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31. 2016

이분음표 현행범

음악 에세이 17 - 진짜와 가짜 사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유럽의 한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었는데, 정통 유럽의 사운드, 최상의 하모니란다. 광고가 거창해 연주 프로그램을 검색해보니 어떠한 성격의 연주회인지 대략 짐작이 갔다. 서곡, 협주곡 두 개, 가곡들, 오페라 아리아, 교향곡. 이 모든 것이 한 연주회에서 행해졌다. 초청된 유럽의 유명하다는 오케스트라는 협연자들의 반주를 주로 맡았다. 말하자면 이 연주회는 각 협연자들이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지인들을 초대하는 연주회였던 것이다.

   

큰 감동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연주회는 안타깝기까지 했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와 협연자를 통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각각의 협연자들이 음악을 이끌고 갔다. 오케스트라는 서서히 긴장의 끈을 풀었고, 이내 숫제 조율 자체가 안 된 음을 내고 있었다. 물론 연주회의 분위기를 만든 것은 오케스트라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연주 내내 계속되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주를 지속적으로 방해했으니까. 그래도 그것이 음악에 대한 직무유기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실력의 차이가 큰 협연자들의 연주는 그래도 즐거움을 주었다. 최고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연주는 또 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협연자의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면서 연주회 마지막 프로그램인 하이든의 교향곡은 더 이상 못 듣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연주회가 다 마치기 전에 연주회장을 빠져나오는 경우는 내게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다양하게 많이 듣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은 아니었다. 음악을 견디며 청중석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음악에 대한 방임죄라도 짓는 기분이었다. 실행에 못 옮긴 이유는 한 가지, 빠져나가느라 옆 사람들의 음악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연속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지언정 들뜬 기분으로 음악을 즐기는 그들이 무슨 죄지 싶었다. ‘오케스트라 때문에 내 소중한 시간이 이렇게 낭비되는구나...’라는 피해의식까지 느끼며 꼼짝없이 연주를 듣고 있었는데, 1악장을 마친 오케스트라가 그대로 연주를 마무리했다. 짐작컨대 연주회 시간에 후원하는 회사의 관계자들이 나와서 한 20여분에 걸쳐 일장 연설과 회사 홍보를 한 것 때문인 것 같았다.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렇게나마 감금에서 해방돼서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어쩌면 깊이 있는 최고의 음악을 선사한다는 그 오케스트라는 한국이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20여분이나 대기하는 상황이나, 또 협연자와 청중의 수준을 가늠해보고는 기가 막혔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점점 맥 빠지는 소리를 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클래식 연주회를 처음 와보신 듯한 앞에 있던 노부부(이분들은 연주 중에도 일상 대화를 큰 소리로 나누셨다)가 파파 하이든을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음악인으로서 미안하고 민망했다.


하이든은 어쨌든 하이든이지 뭐가 제대로 된 하이든이냐고 묻는다면 별로 할 말은 없다. 그래, 하이든은 하이든이니까.

   

그렇지만 자연스레 그 전날의 불쾌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소위 명품 브랜드의 제품을 선물 받았는데, 명품을 잘 아는 이가 그 제품을 보게 됐다. 명품 제품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던 나는 유명한 회사의 로고만 보고는 당연히 그 회사의 제품이려니 생각했다. 포장과 내용물이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곧 그것은 모조품으로 밝혀졌다. 그는 디테일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진품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모르고 속았지만 어이가 없었다. 장인정신으로 유명하다는 그 회사의 로고만 따온다고 그 회사 제품이 될 리가 없다. 그 제품에는 장인의 한 땀 한 땀을 통해 깃드는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에르메스는 에르메스가 아니고 샤넬은 샤넬이 아닌 것이다.  

   

이와 더불어 몇 년 전의 혹독했던 어느 날의 레슨도 떠올랐다. 하이든의 교향곡을 공부하던 시간이었다. 그날 나는 이분음표를 조금 덜 채워서 연주를 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고 저지른 실수에 선생님은 마치 내가 파렴치한이라도 되는 듯이 나무라셨다. 야속한 마음에 현장에 같이 있던 친구에게 “마치 사기라도 치다가 걸린 것 같잖아?”라고 억울함을 토로하며 이분음표와 함께 마음의 감옥에 구속되었다.


그날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심각하게 지었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정육점 주인이 550g을 600g이라고 해서 파는 것과 음악 하는 이가 이분음표를 완전히 채우지 못하고 연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에 생각이 미쳤다. 죄, 맞다.

   

며칠 후에 한 친구에게 이 일에 대해 말했다. 내가 증명되지 않는 죄를 지었노라고. 자초지종을 듣던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맞네. 선생님 아니었으면 완전범죄다. 더 위험하네. 이제 빨리 연습해.” 음악에 얽매어 갇혀 있을 때마다 “자유롭고 싶어서 음악 하는 거 아니야?”라고 도전하시는 선생님 말씀대로 음악이라는 아름다운 질서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스스로와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기를 다짐하며 그날 나는 이분음표와 함께 마음에 붉은 밑줄 하나를 그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저울을 속일 수는 없다. 스스로 더 엄정한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한 음표 한 음표 안에 머무는 정신이 없다면, 하이든은 하이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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