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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31. 2016

적과의 동침

음악 에세이 19 - 문제와 함께 잠들라.

나는 내 목소리에 대해서 걱정해본 적이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자주 고민하지만 목소리 자체가 문제가 된 적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성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목을 항상 의식하고 산다고 했다. 특별히 목이 약하기 때문에 수시로 여러 처방을 하면서 신경을 많이 써야 하며, 조금이라도 건조하거나 무리가 가지 않도록 목 상태를 점검하며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무엇인가를 잘하려고 할 때 갑자기 문제가 부각되는 경험을 우리는 자주 한다. 특정한 어떤 것을 의식하는 순간 쉽게 하던 것조차 어려운 것으로 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목소리가 강점인 성우이기 때문에 그는 목소리를 자신의 약점으로 의식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무대에서 자연스러운 포즈를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사진기 앞에서 편안한 표정을 짓기가 얼마나 난감한지를 대부분이 공감할 것이다. 무대에서 사는 연주자들조차도 연주를 시작하기 직전까지 극도로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연주를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니 더 정확히는 연주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작곡가 슈만이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펼치려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약한 4번째 손가락이 그에게는 극복해야만 하는 심각한 단점으로 여겨졌다. 그는 무리한 연습을 강행했다. 그리고 4번째 손가락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연습으로 결국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사실 연습이라는 것은 잘 안 되는 부분과 어려운 부분에 집중하는 작업이다. 잘 되는 부분조차도 안심할 수는 없다. 실제 연주에서는 약간의 방심만으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습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부분이 연주 때 문제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연주자들은 잘되는 부분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이고 보니 잘되는 부분은 잘되는 부분대로, 안 되는 부분은 안 되는 부분대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흔히 음악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병적인 예민함은 이러한 이유로 발생하고, 심화된다. 


아노 연주를 앞둔 한 친구는 그의 연인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가 걱정이 되면서도 당장 책임져야 할 연주 걱정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몸은 당신이 잘 관리하고 책임을 져야지요... 피아노 연주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병원 침대에 누운 그의 연인은 자신을 간호하느라 그녀가 피아노 연습을 못하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미안해하더란다. 병문안을 다녀온 친구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황당해하면서도 그 순간에는 연주에 대한 압박감에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했다. 이쯤 되고 보면 누가 진짜 아픈 사람인지 혼동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그리고 그 상황을 충분히 공감했다.  

   

많은 음악인들에게 음악을 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다는 대답을 흔히 한다. 그런데 실상은 이들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이들을 가장 위로받고 싶은 존재로 만드는 이들도 바로 음악인들이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그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들이 걸핏하면 모욕을 느끼고 화를 잘 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건실한 바탕의 자기감정과 건전한 양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지요.”

  

작곡가 슈만은 손가락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병적인 예민함을 넘어서 끝내 정신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은 외부와 내부의 적들과의 무수한 투쟁의 결과였다.


베를리오즈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그에게는 사랑이 독약이었다. 실연을 당한 그는 시내를 방황하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서 그는 여느 생활인들과는 전혀 다른 무시무시하고 강렬한 환상을 봤다. 그리고 ‘어떤 예술가의 생활 에피소드’로 이름 붙인 <환상 교향곡>이 탄생했다.

   

음악가들에게는 그가 가진 정신 자체가 그를 가장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적이 되기도 한다. 동시에 가장 다치기 쉬운 취약점이기도 하다.


학회 연주회를 앞두고 신경이 곤두서있는 연주자들에게 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잠자기 전에 머릿속으로 악보를 완전히 그려보고, 일어나자마자 잠도 덜 깬 상태에서 바로 연주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암기 훈련이자 연주 점검이라고. 이러니 맘 편하게 잘 수도, 깰 수도 없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더욱 복잡해진 연주자들에게 다시 그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잠자는 영혼을 깨워서 사세요.” 


욱 부지런히 살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지만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더 열심히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다. 적과 동침해야 한다면, 잠자는 영혼을 깨워야 산다.


게으른 영혼은 예술가들의 가장 큰 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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