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윈도 안에 가죽들이 갇혀 있다. 무심한 표본처럼 납작해진 그들. 철삿줄에 매달려 축 늘어진 갈색 가죽 재킷은 말할 것도 없고 희거나 검은 혹은 하늘색이거나 분홍빛인, 한때는 더없이 빛났던 가방들도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시들하다. 그 옆에 흰 분필로 쓰인 ‘구경 환영’ 글자만이 용케 버티고 있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인 적도 많았다. 그때는 ‘구경 환영’ 글자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기웃거렸을까. 반짝이는 것을 따라 나도 반짝이고 싶었다. 손때 묻은 것이라도 들고 다니면 덩달아 빛나고 돋보일지 모를 일이었다.
작년 여름 동네 근처에 중고명품 가게가 문을 열었다. 그때만 해도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루이비통 구찌 샤넬 프라다 같은 것은 나와는 다른 세상이었다. 살 여유도 없었지만 목걸이나 반지도 답답하고 거추장스럽다고 하지 않는데 그런 것을 사고 싶을 리 만무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153센티 약간 넘는 키에 푸근하다 못해 펑퍼짐한 몸매를 가진 딸아이 친구 엄마. 톡 튀어나온 이마와 까무잡잡한 피부,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심심하게 꽂은 검정 머리핀이며 발목까지 닿는 하늘색 주름치마는 누가 봐도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녀가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남편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은근슬쩍 값비싼 명품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지 않았다면, 값비싼 가방을 모으는 취미가 있든 말든 그것들이 족히 삼사백만 원 넘는 명품이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명품 가방은 작고 펑퍼짐한 그녀를 귀여운 요정으로, 톡 튀어나온 이마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열대 야자나무 같은 섹시함으로,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기다란 주름치마를 개성 만점 그녀로 변신시키는데 한몫을 담당했다.
어느새 귀티 흐르는 그녀로 변해버린 이웃. 아니 내 속에 얼마나 많은 욕심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아차린 나. 욕망이 꿈틀대는데도 물질에 무심한 척 연기를 펼치며 살아왔던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돈 많은 그녀가 부럽기 시작했다.
목걸이 반지 하나 끼지 않아도, 변변한 옷 한 벌 없어도 오히려 비싸고 반짝이는 것은 불편하다며 멀리한 것 같은데 그깟 명품이 뭐라고 나를 흔든다. 그녀처럼 새것은 아니라도 손때 묻은 명품 하나 들고 다니면 허기진 마음이 조금이라도 채워질 것 같았다.
가파르게 절정을 치닫던 욕망은 행운인지 불운인지 중고명품 가게 문턱을 넘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리 더운 여름 한낮이지만 민소매 윗옷을 아래로부터 돌돌 말아 흉측한 배꼽이 다 보이는, 그것도 목덜미부터 손목까지 시퍼렇게 용 문신을 한 우락부락한 덩치가 가게주인이라니. 남자가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에 쥐고 구경하러 들어오라며 문을 여는데 순간 욕망이란 것이 물컹물컹 흐물흐물 녹으며 잽싸게 줄행랑을 쳐버린다. 용기도 없이.
이상한 점은 그 정도 욕망이라면 다시 살아날 법하건만 부활 기미는커녕 어디로 도망쳤는지 찾을 수 없다. 갖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나니 내가 부러워한 실체가 가방이 맞긴 한지 의심스러웠다. 가방이 아니라면 그녀가 가진 무엇이 나를 그토록 부럽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명품 남자를 남편으로 둔 그녀였다. 그녀가 자신 남편과 벌어진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왜 모래를 쌓아놓은 듯 건조한 느낌이 드는지. 명품 남편은 물 건너갔으니 임시방편으로 가방이라도 사야 할 것 같았나 보다. 그래야 남편을 향한 부스럭거림을 잠재울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쌓인 설거지 겨우 끝내고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커피’를 외치는, 청소라도 하자면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나가버리는, 기념일은커녕 생일도 들쭉날쭉 기억하는, 지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눈치 감각 제로인 내 남편.
중고명품 가게가 문을 열었던 작년 여름은 서른 해 가깝도록 일상적 만행(?)을 저지르는 남편으로 인해 몸살을 앓던 중이었다. 그녀와 머물다 집에 오면 나도 모르게 구부정히 졸아 있는 마음. 졸아든 마음을 화살 삼아 내 남편이란 과녁에 찬란히 관통하고 싶다는 충동이 벌어지곤 했다. 남편이 얄미운 만큼 돈 잘 벌고 애처가인 명품남편을 가진 그녀가 부러웠음은 말할 나위 없다.
여름도 지나고 가을이 알차게 달릴 즈음, 한여름 대전을 치르느라 점점 악랄해져 가는 나를 건진 것은 엄마와 아버지였다.
서너 달 전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 온 친정 부모님. 그 시절 어르신들이 대부분 그렇듯 당신들 노후를 아들 아닌 딸 옆에 살게 되면서 한동안 사위 보는 것을 불편하고 민망해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어느 날 남편이 ‘어머니, 저도 이다음에 제 딸 가까이 살 것.’이라며 엄마를 껴안아 드리는 것이다. 평소 살가운 구석 없는 남편의 예기치 않은 모습에 놀라면서 한편으론 무장해제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얼마 전엔 친정집 거실에 못 보던 콩나물시루가 놓여 있어 엄마한테 물었더니 심심하지 말라고 남편이 사 준 것이라 한다. 씨모종이나 묘목을 갖고 와 베란다 텃밭에 심기도 하고 퇴근길엔 붕어빵을 사서 들르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깟 명품이 뭐라고 여름 내내 전쟁을 치렀나 싶은 게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부모님 보면서 노후를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남편. 잘해 드리지는 못해도 자기로 인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안타깝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남편에 대해 가졌던 여름날의 적의가 봄날 강물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명품 남편을 가진 그녀가 부러운 적도 있지만 어느 시기든 각자 가진 색깔로 따뜻한 마음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명품일 것이다.
‘커피는 스스로 타서 마시든지 아님 끓여주든지.’ 걸어가는 내내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이미 커피포트로 향하고 있다. 중고 명품을 위해. 그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