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더위와 어묵국수

by 따뜻한 다경씨

뜨끈한 국물 위로 얇고 기다란 가닥들이 도톰한 산을 이루고 있다. 빨갛고 흰 고명도 긴 가닥과 어우러져 맛을 뽐내는 중이다. 더운 입김 불며 한 숟가락 떠먹어보니 쫄깃한 식감에 얼큰한 국물이 오히려 시원하다.

고스란히 어묵으로 만든 국수는 처음이다. 국수에 고명처럼 어묵이 들어간 것은 먹어보았어도 국수 없는 어묵국수는 낯설었다.


친정 부모님도 처음 먹는 국수가 입에 맞는지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얼른 맛보라고 성화다. 어묵국수에 곁들인 두 분 표정으로도 이미 명품 국수인데 맛이야 말해서 뭐 할까. 마주 앉은 두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친정집에서 내가 만들지 않은 음식을 먹은 게 얼마 만인지. 내 것도 남겨두었다는,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여느 일상 같은 엄마 말에 견고히 참아냈던 마음 하나가 와르르 무너진다.

부모님이 대구를 떠나 내 곁으로 이사 온 지도 3년이 넘었다. 엄마가 치매만 앓지 않았어도 먼 이곳까지 올 일은 없었을 것을. 그랬다면 평온한 날을 조금이라도 더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이의 치매는 이해하면서 엄마의 치매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하루하루가 전쟁이라는 말도 다 맞았다. 수시로 보따리를 사며 집에 보내달라고 재촉하는 엄마를 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그게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이내 돌아와 눈물도 말라버린 황폐해지는 내가 무섭기도 했다.

나날이 지치고 있었다. 치매가 폐가처럼 그렇게 엄마를, 아버지를, 나를 점령하는데도 속수무책 당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요양센터나 재가 요양보호사를 권유해도 딸인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된더위가 온몸을 적시는데도 오랜 윤리에 갇혀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를 만난 날도 폭염에 갇혀 휘청거리던 때였다. 긴 머리에 오십 초반이 무색한, 화사하고 깔끔한 피부며 한 줌에 쥘 듯 가는 허리와 기다란 속눈썹 아래 짙고 섬세한 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몸으로 하는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더군다나 처음 해 보는 일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부질없이 떨어져 내렸다.

더위를 식혀 줄 그늘이 필요했고 바람 부는 어느 곳이든 달아나고 싶었다. 그녀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센터장을 사이에 두고 주춤거리는 나를 눈치챈 것일까. 그녀가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늘은 내게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늘과 바람은 낯설고 혹독한 더위에 내몰린 그녀에게 더 절실했다. 작년 겨울, 남편의 죽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남겨진 그녀. 그녀도 아이들도 모두 갈 곳 잃은 더위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나를 덜어줄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머릿속에 틈 하나 없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엄마의 치매와 내 나이 또래 부모님이 대부분 그렇듯 가부장적이고 연로한 아버지와의 갈등은 연일 나를 옥죄게 했다.

살다보면 지나쳐 온 풍경 속에 서로 닮은 데가 있는 것일까. 그날 처음 본 그녀와 힘들었던 속을 훌훌 털어내고 나니 오히려 단단한 그녀가 의지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와의 인연, 내게는 쉼이지만 그녀에겐 도전이고 용기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된더위 속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만든 어묵국수, 힘들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힌 것일까. 얇고 가느다란 국수 가닥도 진한 국물도 그녀가 아니고선 흉내 내지 못할 서로를 향한 위안이 담겨 있다. 그 맛을 알기에 부모님도 어서 먹어보라고 성화였으리.

나에게 그녀와의 만남은 된더위를 헤쳐 내는 시작이었다. 그녀가 온 후 파편처럼 흩어진 친정 부모님에 대한 연민을 다시 이어 붙이고 있는 나를, 한결 평온해진 엄마 아버지를 보면서 쉼이 돌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였을까. 엄마 집 현관을 열고 들어섰을 때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사람, 마치 그녀가 옛날부터 애교 많은 막내딸이었던 것처럼 친정 부모님과 주거니 받거니 과자를 건네며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그 장면이 내 검은 눈 속으로 넘쳐나 한동안 가슴을 쿵쿵거리게 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아닌, 더위에 지쳐 바싹 말라버렸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아내 문지르고 쓰다듬어 주는, 자신의 상처도 가슴 속에서 삭일 줄 아는 깊은 맛이 일품인 사람이었다.

며칠 전 소나기 내리던 날, 그녀가 먼저 간 남편이 보고 싶어 한참을 울었다며 마음을 쏟아낸 적 있다.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아픔이 얼마나 큰지 감히 짐작도 못 하지만 조금씩 웃음을 찾아가는 그녀를 보면 가을바람 부는 잔잔한 아침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진다.


따뜻한 어묵국수 안에 그녀가 있다. 그 맛을 느끼는 나도, 그 맛을 풀어내는 그녀도 된더위를 이겨 낼 힘을 서로 얻어가는 중일 것이다.


커버사진 출처: https://cafe.naver.com/gagupresident/181391?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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