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 점검을 하러 왔다. 오늘은 필터를 바꾼다고 한다. 필터뿐 아니라 점검하는 사람도 낯선 얼굴이다. 지난번 점검원이 그만두어 자신이 맡게 되었다며 정수기 덮개를 열어 빠른 손놀림으로 필터를 갈아 끼우기 시작한다.
회색빛 단색 카라 셔츠에 까만 일자형 바지를 입은 사십 대 중반쯤 되는 점검원이 필터를 바꾸고 외관을 반짝이도록 닦을 동안 나는 그 여자가 일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살피느라 바빴다. 첫인상에서 즉각적인 해답을 구하긴 어렵지만 옅은 화장에 수수한 얼굴, 분홍빛이 살짝 감도는 입술만큼 뒷모양도 얌전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점검원은 말이 많아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마치 재생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술술술술 아니 전원이나 배터리 없이도 자동으로 음성이 흘러나올 것 같은, 지금껏 단 한 번이라도 말을 멈춘 적 있었을까 싶을 만큼 줄기차게 쏟아냈다. 나의 반응 따윈 아랑곳없었다. 아니 내 말수가 적다 보니 편하게 이야기해도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도 모른다. 회사 상무로 있다는 남편 자랑에 인물 좋은 아들자랑은 물론 세상 둘도 없는 며느리라는 자기 자랑까지 속사포처럼 늘어놓느라 오히려 내가 다음 고객과의 약속을 놓칠까 채근해야 할 판이었다. 가고 나면 정수기 필터 대신 내 속을 바꾸어야 할 듯 식은 차의 뒷맛처럼 고약한 씁쓸함이 온몸을 휘젓는 것 같아 멍한 채로 한참을 앉아 있어야 했다.
며칠 전에도 입술 때문에 곤혹을 치뤘다. 길에서 딸아이 친구 엄마를 만나 근처 카페를 들렀는데 여전히 수십 개의 랩 가사를 이은 것처럼 말이 빠르고 수다스러워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였다. 그날도 말의 변비증을 앓다 방금 헤어나기라도 한 듯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까지 골고루 신나게 끌어당겨 내 앞에 모두 펼쳐 놓을 기세였다. 나는 애꿎은 커피만 손에 들었다 놓았다 하며 지루함을 최대한 들키지 않게 잘 반응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되었다. 게다가 목소리마저 커 카페 주인이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힐긋힐긋 쳐다보는 시선들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은 오히려 나였다.
원래 말주변이 없어서인지 말 많고 수선스러운 사람을 대하면 피로감이 엄습한다. 대화라는 게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데 자기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거리감이 생긴다. 쉴 틈 없이 입술을 달싹이는 사람은 듣는 이가 지루한 불평을 애써 참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이야기에 도취되여 듣는 사람도 궁금해하고 재미있어 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일까.
마무리가 다 되었는지 점검원이 정수기에 꽂았던 호스를 빼 가지런히 정리 중이다. 커피포트에 물이 끓는 동안 읽으라며 내게 건넸던, 식탁 위에 얌전히 올려둔 ‘각시’라는 제목의 홍보용 잡지 한 권을 손에 들었다. 표지 바탕이 살굿빛이다. 그 안엔 진분홍색 접시꽃들이 덩굴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 한 채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 입을 살며시 벌리고 있는 여인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다. 진분홍색 접시꽃. 그 꽃들이 어찌 보면 어린 시절 동네 전봇대에 매달린 스피커를 닮은 듯도 하다. 제목처럼 각시들이 접시 모양 꽃잎들을 스피커 삼아 하나둘 이야기하는 사이 세월 속에 늙어버린 담장처럼 억세고 요란스럽게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이십 년 된 모임이 하나 있다. 대학 친구 여섯 명으로 시작한 모임인데 얼마 전 진희라는 친구가 자신은 그 모임에서 빠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이유는 화수분처럼 끝이 없는 친구, 선미의 일방적이고 직선적인 말투 때문이다.
지난달 만났을 때 진희가 더 있다간 싸울 것 같다며 먼저 가 버려 망정이지 자칫 큰 다툼으로 이어질 뻔했다. 왜냐하면 연하 남편에다가 여전히 공주처럼 사는 진희를 마뜩잖아 했던 선미가 남편을 머슴 부리듯 한다느니, 자식은 그렇게 키우는 게 아니라는 둥 스스로를 모범답안 삼아 진희를 조목조목 나무랐다. 진희가 입술을 씹으며 꾹꾹 참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말려도 소용없었다.
내 입술에서도 프라이버시…스타일…등등의 낱말이 떠오르다 이내 토막토막 끊어지며 머리 저쪽 뒤편에서 자맥질하다가는 가라앉았다. 사는 모양이 어떻든 도란도란 알콩달콩 살아가면 되는 거지, 무슨 정답이 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고장 난 스피커 같은 선미의 억센 말투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수년간 쌓인 감정이라 툭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처럼 조마조마한 만남이었다. 어쩌면 누가 툭 건드려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희가 물기 없이 냉랭한 목소리로 가고 난 후에야 선미는 분위기가 어색해졌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자기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들이 다시 자신 속으로 스름스름 스며들어 발목을 잡아당길 수도 있는데 왜 진작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날 저녁 선미가 맥주 몇 잔에 곤드레가 되어 엄지손가락을 나사못처럼 틀어 올리고 종당엔 자기 가슴을 찍는 촌극까지 벌이며 자신 남편과 아이들로 인한 속상한 마음을 줄줄 토로하지 않았다면 번번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날 때마다 꾹꾹 눌렀던 허기를 한꺼번에 풀어내느라 억센 수다쟁이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표지 속 접시 모양 꽃들 사이를 작은 벌 한 마리가 윙윙대며 넘나들고 있다. 벌이 넘나드는 꽃들이 다른 꽃보다 더 많이 벌어져 있는 것도 같다. 그 꽃들은 다른 사람 아랑곳없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더 크게 소리를 높여야 나를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할까. 난 고장 난 스피커가 아니라고 소곤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누군가의 이야기를 잔잔히 들어주기보다 내 주장만 펼치느라 목소리가 커진 적이 있는지.
뜨거운 물을 커피잔에 부었다. 점검원이 3분만 있어야겠다며 의자에 앉는다. 커피를 마시며 수줍은 눈으로 거실을 이리저리 훑더니 갑자기 가방에서 카탈로그 한 장을 꺼낸다. 그때부터였다. 접시꽃같이 예쁜 진분홍빛 입술이 반짝반짝 윤기가 흐른 것이. 3분은 무슨 시곗바늘이 재깍재깍 삼십 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