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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아빠 Mar 22. 2024

등교-등원-하교-하원

오로지 돌봄을 위해 초등입학 후 첫 휴가 보낸 뒤

첫 아이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휴가를 냈다. 하교 후 돌봄 공백을 메꾸기 위해. 그동안 와이프가 휴가와 재택을 번갈아가며 첫 2주를 버텼다. 


대부분의 날들은 양가 부모님께서 평소 돌아가며 돌봄을 해주시긴 하지만(감사합니다), 이번주는 우리 부부 둘이서 어떻게든 메우는 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긴긴 하루를 마무리하며 거실 소파에서 맥북을 열었다. 

하루를 보낸 소감은, 쉽지 않다. 정말 쉽지 않다. 


돌봄을 위해 첫 연차를 보낸 일이 그다지 특별한 글감은 아니겠으나, 다수의 엄마와 여전히 소수일 아빠들의 일상 중 하나의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한다. 하루 간 겪은 분초에 대한 기억이 곧 휘발되기 전에...



타임라인


어제 나의 타임라인은 아래와 같았다. 


____첫번째 타임블록____

05:00 기상

05:15 분리수거 및 새벽 산책

06:30 집에 돌아와서 와이프 깨우기

07:00 와이프 출근 (당일치기 출장 출발)

07:10 첫째 기상

07:40 둘째 기상

08:00 전기기사님 연락 및 일정조율 (세탁기 콘센트 터짐)


____두번째 타임블록___

08:45 초등학교 등교

08:55 유치원 등원

09:00 카페에 자리 잡고 업무통화 (휴가지만 예상된 업무)

10:00 채용 관련 줌미팅 (역시 휴가였지만 예정된 일정)

10:40 빵 조금 사 먹음

11:00 전기기사 오심. 말끔하게 수리 완료

11:30 유튜브 둘러보기 (놀지는 못하고 프로젝트 리서치...)

12:10 낮잠 조금


____세번째 타임블록____

12:40 초등학교 하교하러 출발

13:05 긴 기다림 끝에 첫째 아이 만남

13:15 아파트 놀이터 데려와서 친구들과 노는 거 지켜보기

13:40 방과후 수업하러 다시 초등학교로 (13:50~15:00)

13:50 늦은 점심. 짜장면 먹으로 이동

14:00 둘째 하원이 14시 30분이라는 점 인지

14:10 집으로 이동. 휴대폰 충전(배터리 5%) 및 집 광속 청소 (방문선생님 오시는 날)

14:30 유치원 가서 둘째 하원, 데리고 초등학교 입구로 이동

15:10 첫째 방과후 마치고 만남. (10분 늦게 나옴. 둘째 30분 안고 있었음 ㅜㅜ)

15:20 집 도착. 남은 청소. 아이들 간식 제공.

16:00 (1) 자란다 영어선생님 오심. 첫째는 방으로 들여보냄

16:00 (2) 둘째랑 나는 책읽기, 매니큐어 바르기, 잠깐 쪽잠


___네번째 타임블록

17:45 선생님 가시고 첫째는 친구집으로 데리고 감 (돌봄 감사합니다. 저녁도 챙겨주심)

18:00 둘째와 김가네에서 돈가스 및 우동 (저녁식사)

19:00 집에 와서 담요 챙겨서 다시 나옴. 유모차 태워서 재울 목적

19:45 둘째 잠듬. 집으로 들어와서 눕힘 (1차 육퇴), 치킨 주문

20:45 양념치킨 도착

21:00 와이프 귀가 (with 첫째 픽업), 치킨 시작 --- 상황 종료!



결론: 12.3km, 16,775보 걸음 (물론 새벽 산책이 한몫했다고는 허나...)




조각난 시간들, 매여있는 주양육자들


타임라인을 뜯어보면 알겠지만, 사이사이 쉴 틈은 있으나 의미 있는 일을 할 틈은 없다.

출근하고 조부모님께 부탁드린 이 시간들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앞으로 부탁드릴 일들은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


사실 아이 둘 다 유치원 다닐 때 나도 종종 하원 돌봄을 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들어가니 차원이 다르구나. 학교와 학원들 사이사이 공백에 대한 해결방안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맞벌이 선배들이 '결론은 (공백 없이 학원에서 태워주는 셔틀) 뺑뺑이'를 주장했구나 조금 이해했다. 학원의 역할이 일종의 육아업무자동화(RPA) 같은 생각이 들기도. 


그런 생각으로 지난 2주를 어떻게든 메꿔낸 와이프에게 '와... 고생했다'는 덕담 카톡 수차례 보냈다.



하루 종일 걸으며 든 상념 하나


요즘 우리나라 출산율 급락은 매일 보도된다. 사실 올해에 터진 문제는 아니지만, 올해가 되어서야 수면 위에 또렷이 고개를 들고 전 국민에게 깊이 와닿는 이슈가 된 것 같다. 왜 출산을 기피할까. 부동산, 상대적 박탈감, 여전히 힘겨운 직장-육아 밸런스, 여성의 경력단절 등 커다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엉켜있다. 


여기에 덧대고 싶다고 생각이 든 것은, 우리 한국 사회는 급속도로, 동시에 최고 수준으로 편리해진 반면 자녀의 육아/보육/교육 편리함은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근데 이게 문제일까? 


오히려 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녀 육아/보육/교육의 편리함을 추구하기는 쉽지 않다. 부모의 관여도가 굉장히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력과 땀으로 키워가는 그게 뭐 어떤가, 당연한 것 아닌가? 오히려 육아를 둘러싼 다른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편리하고 안락한 건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답게 모바일 이후의 편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갖춰버린 것만 같다. 5G가 안 터지는 곳을 찾기 힘들고, 어딜 가든 와이파이가 준비되어 있고. 어느 앱을 쓰든 간편결제가 붙어있고. 모든 지역 주민센터의 공무원들은 친절하고 빠르게 응대해 주고. 유럽 어딜 가면 은행계좌 여는 것만 한 달이 걸린다는데, 우린 모바일로 개설과 송금이 1분이면 충분하고 (그러니 반대급부로 보이스피싱의 타겟이 되는...)


어떤 음식이든 배달 가능하며, 무엇이든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나라. 적어도 서울만큼은 대중교통만 이용해도 모든 곳을 갈 수 있고, 다른 지역과 넘나들더라도 환승과 연계가 완벽한 나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집값 빼고) 적절한 비용과 구독료로 가능한 나라. 


그래서 이렇게 혁명적으로 개선해 버린 우리나라 유저 경험이, 육아 세계와의 유저경험 격차를 너무 벌려버린 것 아닌가, 그래서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를 하나씩 덧대어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애초에 이렇게나 훌륭하고 편리하게 사는 게 필요할까 싶기도. 이렇게 몸과 머리를 부단히 움직여 아이를 키워나가는 자연(내츄럴한) 삶의 형태가 어색해지는 게 아닌 것인지.



글 나가며


사실 이런 타이트한 생활도 몇 년 뒤면 잊힐 경험이다. 첫 아이는 내년, 내후년만 되어도 엄마아빠 도움 없이 학원가를 쏘다닐 테고, 둘째만 잘 케어하면 되는 상황이 곧 올 거란 걸 잘 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많은 엄마들이 직장에서 이탈한다고들 한다. 우리 집 역시 그런 이야기들이 간혹 입 밖으로 나오는 게 사실이다. 아슬아슬하지 않게 서로 그리고 주변에서 따뜻하게 도와주는 덕에 나아가고 있다.


외국은 어떨는지 모르겠다. 다들 알아서들 씩씩하게 그러려니 지나가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아무쪼록 이 시대 우리나라 초등엄마, 초등아빠 그리고 세계 육아인 모두 화이팅 할 뿐. 그리고 상황이 더 나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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