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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Jun 27. 2016

공부에 대한 생각

한국, 미국, 프랑스 대학원생들의 공부하는 방식

*전혀 학술적 근거가 없는 개인의 제한 된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주관적이고 편협할 수 있습니다.


나라마다 다른 국민성을 관찰하는 것은 재미있다. 같은 나라에 산다는 것은 곧 비슷한 밥을 먹으며, 비슷한 유행을 따라 옷을 입어가며, 비슷한 주거 형태 속에 사는 것이므로, 아무리 개개인의 개성이 뛰어나다 해도 비슷한 의식주의 영향권 안에 자라며 형성 된 소위 “국민성”이 사람들을 하나의 특징적 테두리 안에 두루뭉술 묶어 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정도 국민성이 일반화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하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이 범주 안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 분포의 중심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방식을 보면 어떤 나라에서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배움의 정도와 학생의 태도가 매우 판이하다. 


우리 나라는 꼴찌도 일정 수준의 지적 수준까지 꾸역꾸역 끌고 가는 주입식 교육의 대표 주자다. 학교에서 못다한 채찍질은 부모님과 사교육이 팔 걷어 붙이고 나서 돕는다.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고등학교, 심지어 70%가 넘는 국민이 대학교를 졸업하여 아무리 바보라도 읽고 쓸 줄 알고, 곱셈 나눗셈을 할 줄 안다. 다들 웬만한 음감으로 노래도 할 줄 알고, 그림도 못 그린다 해도 기본적인 원근감은 살려낸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졸업의 순간까지가 하나의 일차선 도로라면 우리 나라 교육은 깔끔하게 도로 공사를 해 놓고 하나의 이탈자도 없이 모두 도로에 한 줄을 세워 결승점까지 끌고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고등학교 즈음부터 일부 이탈자나 지름길로 가는 자, 돌아오는 자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결승점(=고등학교 혹은 대학교 졸업)에 꾸역꾸역 들어온다. 그 결과 우리들은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할 줄은 알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내재된 잠재력을 모르고 평생을 살아가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개미형 일꾼들이 많다. 적당히 배운 사람일수록 잘 닦여진 길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프랑스 교육은 일차선 도로에 견주어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와 비슷하다. 교육열이 세고, 좋은 대학 (그랑제꼴 또는 폴리테크닉 등)에 들어가고 싶은 아이들은 재수까지 해가며 공부를 하기도 한다. 미취학 아동부터 영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원어민 보모를 채용하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고, 학군도 알게 모르게 나누어져 있어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맹모삼천지교”식 이사나 등 뒤의 경쟁도 나름 치열하다. 하지만 프랑스와 우리나라는 대학 입학 시험에서 상이하게 갈리는데, 우리 나라가 도로 공사를 미리 해놓고 아이들을 도로에 세운다면, 프랑스는 이 시점에서 아이들을 비포장 도로 앞에 삽과 연장을 주고 던져놓는다. 이 때만은 누가 더 빨리, 좋은 차를 타고 가느냐가 아닌 누가 머리를 굴려 어떤 길을 닦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획일화 된 암기식의 수능과 생각하게 하는 프랑스 바칼로레아는 이렇게 다르다. 하지만 프랑스도 대학에 들어가면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과, 대학원생은 가난하고 취업 준비생은 고달프다는 점에서는 우리 나라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프랑스 교육의 또 하나의 부작용은 바로 “비판적 사고 방식”이다. 바칼로레아는 평이해보이는 문장을 파고들어 질문을 던지고 던지고 던져서,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듯 답을 찾아 내어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의 훈련이다. 이런 철학적 사고의 훈련 탓인지 프랑스에는 인문학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그들은 삶의 전반적인 모든 것들에 질문을 던진답시고 비판한다. 생소한 것들은 생소하기 때문에 비판하고, 익숙한 것들은 익숙하기 때문에 비판한다. 가끔 보면 그들은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듯 하다. 1+1이 2라고 하는 선생님의 말에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이면 “너는 왜 그것이 무조건 2라고만 생각하니?” 라고 질문을 던지며 그 사람의 수긍하는 자세를 비판하는 식이다. 물론 이러한 국민성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고, 그 결과 국민의 권리 신장에 도움이 된 것도 맞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런 피곤한 면도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미국의 교육 시스템인데, 아마 우리 나라가 미국의 교육 환경을 동경하고, 오바마가 우리 나라의 교육 환경을 본받고자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이 둘이 너무 극명하게 다른 가치를 지향하고,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열명의 학생이 공부를 한다고 가정하였을 때 우리나라는 10명 다 결승선을 어떻게든 통과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미국은 1명만 들어와도 좋다는 식의 가르침을 구사한다. 창의력과 자율적 사고를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러한 행태는 결국 교육도 돈으로 주고 사는 소비재 혹은 서비스로 치부되는 미국의 극단적 자본주의 사고방식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학부모가 학비를 내고 자식들을 보냈으니 그에 상응하는 만족감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양질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아이비리그도 등록금 때문에 중국 유학생들의 컨닝을 눈감아주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 결과 미국 교육은 우리 나라 교육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응당 가르쳐야 할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내가 경험 또는 관찰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은 모든 대학 수업이 학기 전에 배울 내용들을 포함한 실라버스(Syllabus)와, 과목 평가 기준 (시험에서 몇%, 출석이 몇 % 따위)을 공유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다. 프랑스 교수들 중에서는 이 syllabus에 딱히 큰 무게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때 마다 미국 학생들이 쌍수를 들고 일어나 교수들의 무책임함을 힐난했다.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는지 예측 가능하게 하여 적절한 수강 신청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시스템을 매우 존중한다. 그러면서 공산품 제품 표시 라벨과 실라버스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시장경제와 함께 발달한 소비자의 "알 권리"가 학교 시스템에까지 접목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기간이 되면 프랑스나 한국에서는 시험 전까지 배운 모든 것이 시험 범위인 경우가 많다. 학생들은 주도적으로 배운 내용을 전반적으로 복습하며,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파악 해야 한다. 공부한 내용이 시험에 나오면 교수가 전달하고자 한 수업의 핵심을 잘 파악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도적인 판단과 선택도 곧 학습의 일부로 간주된다. 반대로 내가 경험한 미국 학생들은 교수들이 시험 문제를 “콕 집어주지” 않는 것을 매우 불합리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챕터에서 어떤 유형의 문제가 나오고, 문제의 수는 총 몇 가지이며, 서술형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평가되는지가 명확하게 공유되지 않으면 공부를 어떻게 시작하여야 하는지 모르는 친구들을 많이 봤다. 

수업 방식 또한 한국이나 프랑스 교수들이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에 수업 시간 대부분을 할애하는 반면 미국은 쌍방향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교수들은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들의 반응을 관찰한다. 학생들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자유롭게 코멘트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수업 중의 대화가 얼마나 이 수업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가 이다. 배우려고 학교에 오는 학생들은 전문가가 아니므로, 당연히 그들의 코멘트 중 대다수는 본질을 빗겨간 것들이 많다. 내가 만난 미국의 아이비리그 교수들은 이러한 학생들의 의견에 딱히 토를 달거나, 방향을 잡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좋은 의견이다.” 혹은 “이와 관련해서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 등의 식으로 간접적인 동의를 해주며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준다. 전달되고자 하는 지식은 수업의 진행과 별개로 교과서 혹은 ppt에 나와있는 경우가 많지만 학점을 받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시험 및 과제는 코멘트에서 드러난 자신의 의견을 좀 더 확장하여 써내는 서술 혹은 프레젠테이션이기 때문에 교과서를 굳이 보지 않아도 A를 받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객관적인 지식의 함양보다는 본인의 (대다수의 경우 부정확한) 의견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배우고 교수에게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을 안고 학기를 마친다. 

아이를 기 죽이지 않고, 전형적인 틀에 가두지 않는 다는 점에서의 순기능은 있지만 미국 교육은 본질적인 교정과 지식 전달의 최소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교육이라는 서비스의 소비자인 학생의 만족감을 최우선의 결과로 지향하는 미국 교육을 받고 자란 대부분의 아이들은 사고의 틀에는 제약이 없지만 무엇이 맞는지, 우리가 당연시하는 상식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 아이들은 정답이 아닐까 두려워 나서기를 꺼려할 때 미국 아이들은 무엇이 맞는지도 모르면서 겁도 없이 나선다. 우리는 그런 미국 아이들의 자신감을 동경하지만 사실 열에 아홉은 요란한 빈수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한 명 나는 동안 수천 수만명의 바보들을 방치하는 것이 미국 교육이고, 노벨상은 못나와도 꼴찌도 방정식은 풀게 하는 것이 우리네 교육이다. 무엇이 더 낫다고는 할 수 없고, 그저 양 쪽 다 장단점이 있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해본다.


덧붙여, 무슨 공통 요소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도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그 외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인도계 이민자들까지)은 모두 하나같이 언변의 귀재들이다. 이것이 비단 칭찬인 것만은 아닌게, 이 사람들은 하나의 단어만 던져주면 하루종일 웅변을 할 수 있는, 하지만 막상 받아써 놓고 다시 읽어보면 핵심이라곤 전혀 없는 말을 늘어 놓는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졌다. 우둔한 군중들을 현혹시키기에 좋은 기술이지만 조금만 똑똑한 청중이라면 몸서리를 치며 싫어할만한 알맹이 없는 궤변이다. 예컨대 독일인이 “사과는 빨개”라고 말한다면 이네들은 “내가 어렸을 적에 사과씨를 심어 본 적이 있는데 며칠을 기다렸더니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이십 년 동안 모진 풍파를 다 겪고 난 뒤에 나무에서 드디어 첫 열매가 맺혔는데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초록색이더니 점점 노란빛을 띄었다가 나중에는 빨개져서 내가 따먹었더니 정말 눈물 나게 맛있더라.” 하는 식이다. 나와 같은 나이 또래의 중국 고학력자들도 어느 정도 이들과 비슷하다. 무조건 먼저 손들고 길게 말하면 이긴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기저에 깔려 있는 듯 하다. 공부하다가, 혹은 비즈니스를 하다가 만나는 이런 달변가들에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종종 기가 죽거나 선제권을 빼앗기곤 하지만, 조금만 침착하게 이들의 어간을 파악해보면 빛 좋은 개살구인 경우가 많다. 


왜 이런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아, 미국은 이래서 부럽다.”, “역시 유럽 선진국은 다르다.” 식의 댓글이 넘쳐 나는 것을 보며 아직도 이렇게 사대주의적, 패배주의적 사고가 팽배 한가 고민을 하게 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다고, 미국 사람 모두가 장밋빛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보다 불평을 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번쯤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더불어 이러한 다른 국민성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 자라오고 배워온 방식이 아닐까 생각하며, 새삼 교육 시스템의 중요성을 자각한다. 인터넷에서 푸념하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남의 떡이 크다고 생각하는 패배주의적 사고 방식을 탈피하고, 자신들이 가진 알맹이를 포장하는 훈련을 한다면 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진 잠재력과 국제 사회에서의 경쟁력이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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