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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Nov 28. 2016

베를린

Meine Lieblingsstadt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면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럽다. 독점욕이기도 하고, 서툴고 어줍잖게 표현했다가 듣는 이들이 함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평가절하하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애정이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물론 짧은 표현으로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지금은 당장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악을 쓰고 소리 지르며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이다. 베를린은 나에게 마치 대학교 첫 남자친구같은 도시다.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사랑했고, 서툴었기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했던 치열한 시간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도 틈만 나면 곱씹을 아름다운 기억들이 남아있고, 그 후에 찾아온 어떤 사랑도 무심결에 비교하게 되는 잣대가 되었다. 그런 베를린을 주말에 친구들과 다녀왔다. 첫 날은 베를린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비행기가 착륙을 하지 못하고 30분을 상공에서 떠돌았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같이 간 친구들은 모두 날씨가 맑지 못하다며 투덜댔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 나를 반겨 주는 11월의 베를린이 고맙고 반가웠다. 2010년 여름 이후로 처음이니 다시 돌아가는데 꼬박 육년하고도 반이 걸렸다. 다시 베를린에 갈 수 있게 된다면 어떤 그림일까를 수없이도 많이 상상했고,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다 가지 못했던 곳을 정말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과 사람의 조합으로 가게되었다. 꿈꾸었던 완벽한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닥 들뜨지도 않았었지만 S Bahn에 올랐을 때 콧 속으로 훅 들어 온 익숙한 베를린의 지하철 냄새에 나도 모르게 왈칵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추위를 조금이라도 이겨 보려고 밤낮으로 걷는 대신 뛰어다녔던 동베를린의 길들과, 일을 마치고 혹은 친구들과 진탕 놀고 혼자 걸어서 집에 가는 길에 보던 Warchauer strasse와 Ostkreuz의 고가도로 양옆으로 펼쳐지는 황량한 철길과 잿빛의 퀘퀘한 풍경들, 비싸지도 않았지만 사치를 하고 싶은 날들만 갔던 Oderberger strasse의 와플집의 와플 가격은 6년이 지났는데도 바뀌지 않았다. 내가 살았던 2009년, 2010년만 해도 베를린은 고작해야 일렉트로닉 음악 마니아들만 DJ들을 구경하러 찾는 곳이었는데 최근 5년 간 베를린은 전세계 힙스터들이 찾는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길에서 영어가 부쩍 많이 들리고, 호스텔의 수도 늘어났고, 예전에는 동양인인 나에게도 독일어로 주문을 받던 카페와 식당들도 이제는 서버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을 먼저 거는 것이 생소했다. 나와 베를린은 오래 전 특별함을 함께 공유한 사이인데 이제는 나도 그저 귀찮은 관광객 중 하나가 된 것 같아 속이 상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여전히 겸허한 도시다. 여전히 관광책자와 트립어드바이저에는 나와있지도 않고, 그래서 그들의 별점에는 연연하지 않는 소소한 상점들이 그들만의 자리를 잡고 있고, 관광객보다 로컬이 많은 도시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색깔과, 여유로움과 진정성과 사람사는 냄새가 짙은 곳이다.


베를린이 외부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일렉트로 DJ들의 성지, 히피들의 여름 도시, 무너진 장벽을 소재로 한 다양한 관광지들이 있는 독특한 도시 따위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베를린의 어둡고 쓸쓸한 겨울을 알고, 전쟁의 총알 자국이 아직 남아있는 벽들을 알고, 겉으로는 무뚝뚝한 냉전시대의 건물들 속의 따뜻한 사람사는 모습들을 알고, 지금은 때가 타고 그래피티로 얼룩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아름답던 모습을 알고, 이제는 그 진정성을 잃어버린 타셸레스의 거칠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지금은 "Photoautomat"이라는 조금은 세련된 스펠링을 제목으로 단 복제품이 너무 많아져버린 낡은 Fotoautomat들의 진짜 위치들을 알고, Alexanderplatz, Kochstrasse, Hackschermarkt 같은 유명한 정류장들 말고도 Lichtenberg, Noeldner Platz, Hohenzoler Platz, Tierpark 같은 나만의 의미가 있는 정류장들이 있고, 유명한 무스타파 케밥보다 더 맛있지만 아무도 줄을 서지 않는 케밥집이 Schlesisches Tor에 있다는 것도 알고, 남들이 다가는 Watergate, Matrix말고도 매주 바뀌는 암호를 대어야 갈 수 있는 Mittwoch와, 당근치즈케이크가 맛있었고 아저씨가 정이 많았던 Petite Madeleine이라는 카페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베를린도 철없던 시절 나의 가장 아팠던 첫 이별을 보았고, 술에 취해 혹은 일에 쩔어 새벽길을 뛰어가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감자와 맥주, 소세지로 살이 뒤룩뒤룩 찐 내 최고 몸무게를 찍던 시절을 알고 있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서로에게 특별한 상대라고 생각한다.


예전보다 할 수 있는 독일어가 많이 줄어든 것이 못내 아쉬웠다. Ja 대신 Oui가 먼저 나오고, Bitte가 S'il vous plaît보다 너무 짧아서 문장을 끝내기가 어색해지는 내가 괜히 겸연쩍었다. 다시 찾아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는데 친구들 일정에 맞추느라 짧은 주말 동안 마음껏 재회의 회포를 풀지 못한 것도 아쉬웠고, 나와 추억을 함께 나눈 사람들을 미처 볼 시간이 없었던 것도 속상했다. 하지만 너무 변한 모습에 예전의 좋은 기억이 망가질까봐 선뜻 오지 못했던 그 동안의 두려움이 비로소 사라졌고, 적당히 변했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베를린의 모습에 안도했고, 그래서 이제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사이가 된 것 같아 홀가분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여행은 마치 결혼한 첫 남자친구의 돌잔치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는 언젠가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살게될 것 같다. 베를린은 지금 내 모습의 많은 부분을 만들어 준 곳이고, 페이스북 추억 공유 포스팅 따위로 가볍게 감히 꺼내지 못하는, 아무에게나 털어놓고 싶지 않은 그런 기억을 새겨놓은 곳이다. 많이 노력해도 역시나 베를린과 나 사이를, 베를린에 대한 내 마음을 글로 담기에는 턱없이 내 문장력이 부족하다. 술취해서 하는 고백처럼 내일이면 후회할 것 같은 글이 될 것 같지만 지금은 이게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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