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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Mar 07. 2018

좀 야한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한데

난 어차피 유학 간 여자라 시집가기는 글렀으니 또라이인척 한번 써볼게

요즘 한국의 미투 운동 관련 기사에서 유독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합의에 의한 성관계” 혹은 “연애 감정이 있었다”는 가해자의 변론들이다. 권력을 남용한 성추행은 다른 나라에서도 문제지만 미투 운동이 한국보다 더 크게 번진 미국에서도 저런 변명을 한 가해자는 없다. 합의와 연애 감정을 주장하는 남자들은 조민기, 조재현같은 사람들과는 다른 류의 가해자들이다. 저들은 분명 진심으로 억울해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변명을 읽은 일부 남성들은 겉으로는 가해자를 욕하면서도 속으로는 여자가 행동을 애매하게 해서 억울한 남성들이 성추행범으로 오해받는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왜 이런 오해가 유독 한국에서만 발생하는가?

이성 관계에서 한국 남성들은 여자의 피드백을 소위 말하는 “서방 선진국” 남자들과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외국 남자를 만날 때 유독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나의 “미소+침묵”을 동의의 표현으로 받아들지 않고 거듭 “YES”라고 답할 때 까지 되묻는 그들의 습성이었다. “이건 어때?”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 “넌 왜 피드백이 없어?” “나 잘 하고 있어?” 따위의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에는 직접적인 대답을 하기가 부끄러워 그냥 미소를 지었다. 나의 한국적인 사고방식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말 없이 미소를 띄는 행위에서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세지는 아마도 적나라한 욕구의 표현은 함부로 하지 않는, 그렇지만 미소로써 내 대답이 부정이 아님을 흘리는 수줍은 듯 사랑스러운 여성의 이미지였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여자는 조신하고, 신비로워야 매력적이라 배웠다. 성(姓)과 관련 된 영역에서 자신의 의견,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여자는 “꽃뱀” 아니면 “걸레” 내지는 “쎈 언니” 또는 “피곤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인식이 학습에 의해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 유독 불편했다. 피드백을 묻고 대답을 요구하는 저들의 행위는 남자와 여자 모두가 관계에서 즐거움과 만족감을 얻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들도 노력을 하겠다는 존중과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 남자를 만날 때에는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도 없었고 (특히나 관계의 초기에서는 더욱), 내 미소와 침묵의 의미를 궁금해 하여 캐묻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단언컨대 내가 만난 사람들을 까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늘 사회적 지위나 학벌, 인성 등에 있어서 평균 이상의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조차 저런 모습이 없음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수동적임과 강력한 거부 의사의 부재는 내가 겪은 외국에서는 “동의의 부재”로 해석되는 반면 한국 남자에게는 “거절의 부재” 혹은 “암묵적 동의”로 인식되는 것이 가장 큰 문화적 차이임을 지적하고 싶은것이다.

분명 피해자들은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단호한 거절보다는 미소를 동반한 예의바른 에두른 표현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성들은 그 두루뭉술한 표현에서 거부 의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을 것이다. 술 자리에서 혹은 클럽에서 말을 걸어 오거나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남자들에게 웃으며 기분 좋게 거부 의사를 표현하였을 때 외국에서는 거의 100퍼센트의 확률로 남자 역시 쿨하게 웃으며 지나간다면, 한국에서는 두세번은 물어보고 거절에 기분 상한 티를 내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심지어는 반 강제로 손을 잡아끄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외국에서는 저런 행위는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조금 더 일상에 가까운 예를 들자면 "집에 데려다 줄게", "내 차로 태워다 줄게"라는 제안에 웃으며 "괜찮아요" 거절을 하면 외국 남자들은 대부분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마지못해 승낙할 때까지 계속 물어보는 바람에 불편하게 남의 차를 얻어타고, 혹은 택시를 함께 타고 집에 온 적은 많다. 이 모든 행위가 성추행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예는 오히려 호의의 표시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할 수도 있다. 단지 남자가 호의/호감을 표시했다는 이유만으로 저 상황이 합리화가 될 수 있는가. 그렇게 싫으면 왜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저 상황에서 누구도 오해할 수 없을만큼 정색하고 "정말 싫어요"라고 했다면 그 후의 뒷감당은 누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 나는 스스로가 꽤 직설적이고 겁대가리없이 의사 표현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조차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특히 상대방이 내가 평소에 좋게 생각하던 손윗사람일 경우에는 대처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상황에서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하여 내가 참고 좋게 넘어가주려고 했던 편이다. 나같은 사람에게도 저런 불편한 상황이 생길 정도라면 나보다 온순하고 예의바르고 상냥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어떻겠는가? 아마도 피해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존경하는 은사, 선배였기 때문에 쉽사리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하고 난 이후에도 한번의 실수로 좋게 보았던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넘어가주자 합리화 했을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그건 아닌 것 같아도 내가 충분히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는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상대방을 보면서 내가 괜히 과민 반응을 했나보다 의아했을 것이다. 반면 가해자들은 그 순간 진심으로 여성들이 싫어하지 않았다 생각했을 것이고, 그들의 지속 된 침묵에서 더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황당하고 억울했을 것이다. 

가해자들과 비슷한 사고 방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기사에서 저런 단어들을 접하면서 저마다의 경험에 기인하여 속으로 가해자를 동정하는 남성들도 꽤 많을 것이다. 요즘 성추행범으로 몰릴까 무서워 직장에서도 여성 동료들을 피하는 소위 "펜스 룰"을 시전하는 남자들에 대한 기사를 봤다. 사실 저 정도의 반응을 보일 남자라면 여성 혐오의 표출, 아니면 도둑이 제 발 저린 꼴 둘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기사를 읽으며 그 동안 여성의 피드백에 무관심하게 살아 온 기득권 남성들이 “나도 혹시 가해자는 아닐까” 겁이 나 선뜻 미투 운동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깊이 뿌리 내린 문화적인 요인(소위 말하는 거절의 미덕)에서 기인하는 것이니 마냥 모든 한국 남자를 탓할 수 만도 없겠다. 그래도 여자가 너무 애매모호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추행범이 될 수도 있다고 불안해하는 남자들은 추행의 유무룰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의도가 아닌 상대방이 느낀 불편함의 정도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미소는 동의의 동조어가 아니다. 침묵은 암묵적 동의가 아니다. 에두른 거절도 거절이다.


(그리고 여자들도 좀 더 용기내서 당당하게 표현하자. 나는 우리를 조신하고 상냥하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여자로 키운 대한민국 사회가 짜증이 난다. 그리고 소수가 내는 목소리는 "걸레", "쎈 언니", "피곤한 페미니스트"로 낙인찍힐지 몰라도 다수가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새로운 정상(正常, Normality)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투 운동에 동참하는 모든 멋진 언니들을 응원한다.)

#MeToo #WithYou #Time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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