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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Oct 22. 2019

오늘 서른 살이 되었다.

기념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미역국을 끓였다.

서른번 째 생일이다. 이번 주 내내 위험 지역 출장 대비 유엔 직원 안전 교육을 받아야 해서 평소보다 한시간도 더 일찍 일어나 출근을 했다. 밤새 부슬거리면서 내리던 비가 세찬 빗줄기로 변해 교육을 받는 하루 종일 창 밖에서 쏟아졌다. 몸을 쓰는 교육이라 그냥 편한 옷을 입고 갈까 하다가 그래도 생일이니 너무 후줄근하진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 청바지 위에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빗길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했더니 비옷 속 가죽자켓 속 얇은 블라우스는 두 팔과 몸에 불쾌하게 들러붙어 있다. 첫 날인 오늘은 조건이 열악한 현장에서 긴급 의료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의료진에게 닿기 전 우리가 할 수 있는 응급조치들을 배웠다. 급성 과다 출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슴을 관통하는 상처는 어떻게 응급 조치를 하는지, 눈 앞에 부상자가 여러 명 있을 때 누구를 먼저 처치하여야 하는지 등의 무시무시하고 지극히도 실용적인 내용들에 대한 이론을 배운 후 실습을 하는 형식이었다. 시리아 유혈 사태 중 한 청년이 카메라 앞에서 허벅지에 총을 맞아 몇 십초도 안되는 순간에 기절을 하는 모습도, 어깨 뼈가 훤히 내다보이는 상처에 특수 지혈용 거즈를 쑤셔 넣는 모습도 씩씩하게 보았는데 쇼크의 진행 과정을 칠판에다 맥박수, 혈압, 호흡 속도, 의식의 정도의 변화를 써가며 설명을 하는 때에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나서 숨이 덜컥 막혔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창 밖의 빗줄기를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다. 


삼십년 전 엄마는 제사 준비를 하던 도중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가서 저녁 여섯시 반 즈음에 나를 낳았다고 했다. 그 때 엄마의 나이가 한국으로 치면 서른 하나, 만으로 서른하고도 한달이 조금 더 넘었을테니 나는 엄마 인생의 절반도 채 함께하지 못한 셈이다. 프랑스 문화권에서는 서른 번째 생일은 유독 특별히 챙기는 경향이 있어 주변에 서른 살을 맞은 친구들은 저마다 왁자지껄한 파티를 열고, 지인들은 모두 힘을 모아 큰 선물을 마련했다. 자연스레 나의 서른 번째 생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몇 달 전부터 쏟아졌지만 나는 아무런 축하도 받기가 싫었다. 오히려 이런 교육을 받게 되어 직장에서 동료들이 열어 줄 어색함의 극치인 생일 파티도 피할 수 있으니 잘 되었다 싶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혼자 숨어 버리고 싶었다. 서른 살 생일이 나를 찾아 올 수 없도록.


이주 전에 아직도 즐겨찾기에 추가 되어 제일 첫 줄에 뜨던 엄마의 카톡 프로필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엄마의 옛 전화번호를 가져가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가끔씩 울지 않을 용기가 날 때 마다 열어서 보던 엄마의 카카오톡 사진들이, "천천히 오래 곁을 지키기"라 적혀있던 프로필이 사라지니 엄마가 다시 한번 내 곁에서 사라진 것 같아 어두운 집 안에서 몇 시간을 울었다. 지우지 않고 남아있던 엄마와의 채팅창에는 웃는 엄마 얼굴 대신에 회색바탕에 흰 상체만 남은 (존재하지 않는 사용자)가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매 년 생일마다 "우리 딸 생일 축하해. 미역국도 못 끓여줘서 마음이 안 좋네. 맛있는거 많이 챙겨 먹길! 늦은 생일 미역국은 대구 오면 끓여줄게 " 의 맥락을 가진 카톡을 보내곤 했다. 오늘은 유독 그 카톡 생각이 많이 나서 퇴근하고 집에 와서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을 끓여 내 생일상을 차렸다. 어렸을 때 자주 먹던 애호박전도 부치고, 외할머니가 미역과 함께 바리바리 싸준 깻잎 김치를 잔뜩 꺼내고 내가 만든 파김치도 썩둑썩둑 썰어 무려 삼첩 반상을 받았다. 어렸던 나는 늘 생일은 그 때 그 때 곁에 있던 남자 친구, 친구들과 왁자지껄 챙기기에 바빴고, 미역국은 뭐하러 굳이 챙겨 먹나 하는 생각을 하며 엄마의 카톡에 형식적인 답장만 했지 한번도 그 흔한 애교 섞인 "낳아줘서 고마워" 따위의 답장을 한 적이 없다. 


엄마와 나는 둘다 책을 좋아했다. 항상 집에 가면 거실 테이블 위에는 엄마가 그 때마다 읽고있던 책들이 있었고,  엄마 차 안에는 영덕이의 학원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며 읽던 시집들이 항상 한권씩 꽂혀 있었다. 작년에 짐을 정리하며 챙겨 온 몇 권의 시집들은 여지껏 책꽂이만 지키고 있었는데, 술에 취한 어느 날 어디에 홀린듯이 그 시집들을 꺼내 뒤적이다 엄마가 페이지 한 쪽 귀퉁이를 접어 둔 시를 발견했다.



病 (병)

기형도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메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늘 단단한 모습만 보여주다가도 엄마가 가끔씩 나한테 늘어놓던 투정과, 푸념과, 슬픔섞인 화와 넋두리들이 망치가 되어 머리를 한 대 치는 것 같았다. 총명하고 꿈도 많던 문학소녀에게 지금의 당신은 얼마나 낯선 모습이었을까. 그렇게 턱턱 숨 막히는 어둠에서도 노랗게 단풍들어보려는 절박하면서도 시적인 노력은 얼마나 김희정다운가. 나는 엄마의 아픈 마음을 아예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내 삶이 너무 바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엄마의 약한 모습을 더 위로해 주는 의젓한 큰 딸이었더라면 엄마는 조금 덜 아프지 않았을까. 어두운 생각들과의 싸움에 지쳐 있는 요즘이라 더욱이, 저 시에 공감하며 책 한쪽 모서리를 접었을 엄마의 마음이 생각 나 많이 슬펐다. 엄마는 병을 발견하고 나서 이상하리만치 빨리 초연해졌고 미련없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작년 이 맘때에는 너무나도 빨랐던 엄마 상태의 악화가 내 탓은 아닌지 (엄마는 내가 입사를 포기하고 엄마 옆에 남아 병간호를 하겠다고 했을 때 단호하게 화를 내며 반대했었다) 자책을 많이 했었다.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엄마의 삶이 나와 김영덕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후련하게 떠날 수 있을만큼 아픈 것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왜 나는 여지껏 하지 못했을까. 


한국을 다녀온 이후 단단히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방패가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버리게 되었다. 며칠을 연락도 안받고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기도 했고, 눈 앞이 노래질 때까지 굶기도 하고, 며칠 씩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어두운 불안이 밀려올 때 마다 술에 의존하는 자기 파괴적인 습관을 반복했다. 어느 날은 회사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화장실로 뛰어 가기도 했다. 무서워서 찾아 간 병원에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우울증 약과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먹고 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아직도 많지만 엄마는 고목같은 마음에도 단풍을 들게 했음을 기억해야겠다.  


생일 축하를 참 많이 받았다. 비오는 오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던 길이 평소보다 고요하여 평화로웠다. 혼자 먹은 생일 저녁상도 맛있었다.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는데 아빠가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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