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고 자책하기를 반복하다가 쓰는 글
학창 시절, 연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갈등상황에 놓이는 걸 못 견뎌하는 성격이라 누군가와 싸우지도, 갈등상황을 만들지도 말려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이 얼어 죽을 ‘화’를 자주 많이 만난다. 누군가 모든 갈등상황에서 빨리 벗어나라고 했던가. 득이 될 리 만무한 ‘화’에 절여진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라는 말임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최근 화를 많이 내 본 사람으로서(;;;) 정신건강에도 몸건강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하지만 ‘갈등상황에서 빨리 벗어나라’는 말은 마치 ‘크게 심호흡을 해’, ‘열까지 세봐’처럼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통제불능의 상황에서는 내겐 무용한 편이었다. 그저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에 ‘이건 지나가는 거야’ ‘아이들은 크고 있어’라는 허상이 어슴푸레하게 있을 뿐, 실전에서 그 개념을 즉시 떠올려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못난 나는, 그 개념을 떠올려 갈등상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그냥 콱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내 화에 즉시 짓이겨진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내 화에 나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날에 육퇴를 하거나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나는 또 생각한다. 그 생각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후회와 자책이겠지만. 오늘 낸 이 화는 아이 때문이 아니라 못난 나 때문이다. 그러네 나 때문이네... 여유라고는 없고 사랑이라고는 없는 빈 깡통 같은 못난 나 때문이네. <어린이라는 세계>의 김소영 작가처럼 나는 왜 어린이를 사랑스럽게 대하는 방법을 모르는 걸까. 그런 게 내 안에 있기는 한 걸까. 심지어 내 아이인데도, 왜 심통이 났는지, 왜 짜증을 내는지, 왜 말을 안 듣는지(!) 아이의 시선에서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는 없고, 그저 내 화에 쩔쩔매는 꼴이 우습고 부끄럽다. 화나는 것도 서러운데, 참... 이렇게 또 못나기까지 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부여잡고 글을 쓴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키는 아이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는 것을. 이건 수학, 아니 산수처럼 명료해서 이걸 되새길 때마다 아이에게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미안하고 내가 몹쓸 엄마처럼 느껴진다. 다 읽진 않았지만 육아와 엄마의 감정에 관한 수많은 도서들, 제목만 봐도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데, 나도 내 아이에게 내 감정을 쓰레기처럼 버리지 말아야지, 어른의 말로 윽박지르거나 조종하지 말아야지, 화내지 말아야지, 매번 생각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그것도 자주 반복되는 갈등상황에 노출되다 보면 언제 그런 다짐을 했냐는 듯 기어이 또 화가 나고 말고,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내가 나는 또 너무 화가 나는 거다.
내 바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모멸감과 싸우는 일, 너무 아프지만 못난 나를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일,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객관화. 그 때문에 내 시간과 공간, 내 일, 나의 무언가를 시작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시간을 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력을 길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잘 자고 잘 먹어야 한다. 쓰다 보니 시작점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내 삶을 바닥부터 다시 귀히 돌보는 것,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스트레칭과 고요한 시간과 따뜻한 차로 아이보다 하루를 미리 시작해 두는 것, 자주자주 못난 나를 살피고 객관화하는 것, 가끔 친구들을 만나 이쁘다 잘한다 격려하고 위로받는 것... 그리고 내가 못난이라는 것을 아는 것.
“오늘도 미안하다. 엄마가 못나서 또 화가 나고 말았어. 안 그러고 싶지만 아마 또 화가 날 거야. 그럼 모진 말이 튀어나올 수도 있어... 정말 안 그러고 싶지만 자꾸 화가 나고 슬퍼. 하지만 그 감정에서 빨리 벗어나고 즉시 사과할게.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볼게.”
엄마도 너도 크느라고 수고가 많다.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