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출처 : https://ancientelectronics.files.wordpress.com/2014/04/386pic2.jpg). 게시글과 관계 없음.
지난 주말 아버지로부터 짤막한 메시지가 왔다. 시간 날 때 전화를 좀 달라고 하시기에 아이들 낮잠 재우고 연락을 드렸더니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고 하신다. 평소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막상 컴퓨터가 먹통이 되니 아들래미 유튜브 보기도 어렵고 영 답답하시다 하여, 몇 년 전 사무실 PC를 교체한 후 방 한 구석에 쟁여두었던 컴퓨터 본체를 드리기로 하였다. 새 것을 사드리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최신 물건들은 종래 사용하시던 PC와 포트 유형이 달라서 헷갈리실 것 같고, 차라리 사용하던 컴퓨터에 불필요한 데이터만 삭제해서 드리는 것이 사용하시는데 더 편하실 것 같아, 문서파일과 앱데이터 등을 정리해서 전달드리기로 했다. 좀처럼 아들에게 부탁 같은 것은 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혼자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이 야밤에 아이들을 재우고 요로코롬 조로코롬 컴퓨터 정리를 하다보니 문득 내가 처음 컴퓨터를 접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이렇게 글을 남겨둔다.
나는 또래에 비해서 비교적 컴퓨터를 잘 다루는 편이다(지금도 그런 것 같다). 소프트웨어 뿐 아니라 하드웨어도 비교적 친숙한 편인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학교 1학년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사주셨던 386 컴퓨터가 그 시작이었던 것 같다. '현대 멀티캡'이라는 이름의 PC였는데 가격이 무려 135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아버지 한 달 월급보다 큰 돈이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지금 생각하면 하드디스크가 500mb 밖에 되지 않고 RAM도 8mb 밖에 되지 않은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같은 것이지만, 그 때만 해도 거의 최고 사양의 물건이었던데다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CD-ROM이라는 미래(?) 장비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 걸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요즘 말로 '인싸'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난 그 컴퓨터로 친구가 건네주었던 3.5인치 디스켓에 담겨있는 PC게임(제목은 비밀에 부친다)을 구동시켜보겠다며 메모리 분배를 변경해보기도 하고, 용산전자상가에 가서 부품을 사서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 해보기도 하며, 16진법 게임데이터 수치를 변경해서 게임 내 경험치를 올려보기도 하는 등(프로그램 명칭이 'RPG쯔꾸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의 액티비티를 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컴퓨터라는 물건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덕분에 컴퓨터에 관련된 일은 어떤 일에 있어서도 주눅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행해 올 수 있었고, 심지어 변호사가 된 지금도 IT 비즈니스 관련 법률자문을 할 때 비교적 제반기술에 대한 이해가 빠른 편이어서 의뢰인들로부터 소통하기 편하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만일 아버지께서 그 시절 월급보다도 비쌌던 그 컴퓨터를 사주시지 않았다면 모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부모의 선택과 결단이 자녀의 인생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누히 눈과 귀로 익혀왔지만, 지금 내 모습과 그 시절 아버지의 결단을 떠올리니 그 체감이 더 깊다.
아버지는 그 때 어떤 생각으로 그 비싼 컴퓨터를 사주셨을까? 아마도 다른 아이들로부터 뒤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거나, 자식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싶은 마음이었거나, 실수로 내뱉은 약속이지만 약속을 지키는 부모가 되고 싶었거나, 혹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에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였건 탁월한 선택이었고 그 덕분에 난 더 넓은 세상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조만간 아버지에게 컴퓨터를 건네드리면서 꼭 말씀드려야겠다. 그 시절 아버지의 선택은 탁월했고 그 덕에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나 역시 아버지처럼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노력하겠다고. 그리고 감사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