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black out)과 패싱아웃(Passing out)
형법 제299조에 따른 [준강간죄]란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타인을 간음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의미한다. 해당 범죄의 구성요건 중 실무상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이다. 특히 지인 사이(직장동료 등)에 과도한 음주를 한 뒤 만취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진 후 형사입건되는 사안에서 해당 구성요건 성립여부가 주로 문제되는바 주된 사건 유형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당시에는 상호 합의하에 성관계가 이루어졌으나 술에서 깬 여성이 성관계에 이르게 된 경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2) 어떤 경위로 성관계에 이르게 되었는지 두 사람 모두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
3) 의식이 있었던 남성이 여성이 의식을 상실한 상태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간음한 경우
각 사건 유형별 법적취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블랙아웃(black out)과 패싱아웃(passing out)의 개념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위 사건 유형 중 1 및 2는 성관계 후 블랙아웃이 발생한 사안인 반면, 3은 패싱아웃이 발생한 사안임).
‘알코올성 블랙아웃(black out)'이란 중증도 이상의 알코올 혈중농도, 특히 단기간 폭음으로 알코올 혈중농도가 급격히 올라간 경우 그 알코올 성분이 외부 자극에 대하여 기록하고 해석하는 인코딩 과정(기억형성에 관여하는 뇌의 특정 기능)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행위자가 일정한 시점에 진행되었던 사실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코딩 손상의 정도에 따라 단편적인 블랙아웃과 전면적인 블랙아웃이 모두 포함한다. 결국 '블랙아웃'이란 행위 당시에는 사리분별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행위와 승낙이 이루어졌으나 혈중 알코올이 과다하여 그러한 경험이 기억에 기록되지 않은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서, 단지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성관계에 이르게 된 경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상태를 이용하였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는 평가에 이르게 된다.
그에 비하여 '패싱아웃(passing out)'이란 알코올의 심각한 독성화로 인한 의식상실의 상태, 즉 알코올의 최면진정작용으로 인하여 수면에 빠지는 상태를 의미하는바, 법률이 규정하는 의식불명 또는 심신상실의 상태와 가장 일치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만일 피해자가 패싱아웃 상태였다면, 가해자가 의식이 있었는지 여부 또는 블랙아웃상태로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상태인지 여부를 불문하고, 준강간/준강제추행죄가 성립될 수 있다.
위 살핀 바와 같이 피해자가 성관계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남성을 준강간/준강제추행죄로 고소할 경우, 피해자가 블랙아웃 상태였다면 범죄성립이 인정되기 어려운 반면, 패싱아웃 상태였다면 범죄성립이 인정될 수 있다 할 것인바, 실무상 어떠한 기준과 증거들에 의하여 양자가 구분되는지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피고인이 피해자의 블랙아웃을 주장하는 사안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기준
우리 대법원은 준강간 또는 준강제추행죄로 기소된 사안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블랙아웃'을 주장하는 경우 이에 대한 판단기준을 다음과 같이 판시하고 있으므로 실무에 참고할 만하다.
"음주로 심신상실 상태에 있는 피해자에 대하여 준강간 또는 준강제추행을 하였음을 이유로 기소된 피고인이 ‘피해자가 범행 당시 의식상실 상태가 아니었고 그 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라는 취지에서 알코올 블랙아웃을 주장하는 경우, 법원은 피해자의 범행 당시 음주량과 음주 속도, 경과한 시간, 피해자의 평소 주량, 피해자가 평소 음주 후 기억장애를 경험하였는지 여부 등 피해자의 신체 및 의식 상태가 범행 당시 알코올 블랙아웃인지 아니면 패싱아웃 또는 행위통제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였는지를 구분할 수 있는 사정들과 더불어 CCTV나 목격자를 통하여 확인되는 당시 피해자의 상태, 언동, 피고인과의 평소 관계, 만나게 된 경위, 성적 접촉이 이루어진 장소와 방식, 그 계기와 정황, 피해자의 연령·경험 등 특성, 성에 대한 인식 정도, 심리적·정서적 상태, 피해자와 성적 관계를 맺게 된 경위에 대한 피고인의 진술 내용의 합리성, 사건 이후 피고인과 피해자의 반응을 비롯한 제반 사정을 면밀하게 살펴 범행 당시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
2) 실무상 주로 활용되는 증거의 유형
가) 범행 전 피해자의 행태가 기록된 CCTV 영상
실무상 가장 많이 활용되는 증거는 범행 전 가해자와 피해자의 행태가 녹화된 CCTV 영상이다. 과도한 음주 및 알콜 독성으로 인하여 패싱아웃(passing out) 상태에 빠져있는 피해자는 정상적으로 보행할 수 없으며 보행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몇 걸음 가지 못해 중심을 잃고 넘어지거나 주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채 바닥에 드러눕는 등의행태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에 비하여 블랙아웃(black out) 상태에 빠진 피해자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정상적으로 보행하거나 비록 비틀거리더라도 상당한 거리를 보행할 수 있고, 나아가 성관계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에 남성과 비교적 다정한 모습(팔짱을 끼거나 몸을 기대는 등)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준강간 범죄는 숙박업소(호텔, 모텔 등)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모든 숙박업소가 로비와 엘리베이터 내에 CCTV를 갖추고 있으므로 범행 직후 해당 CCTV영상을 확보한다면 사건당사자가 범행 당시 패싱아웃 상태였는지 아니면 블랙아웃에 빠진 것인지 여부를 비교적 명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엘리베이터 내 CCTV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은 밀폐된 공간이기에 만일 엘리베이터 내에서 두 사람이 다정하게 기대어 있거나 포옹하고 있는 등의 모습이 확인된다면, 피해자(일반적으로 여성)가 패싱아웃상태에 있지는 않았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는 저명한 증거가 될 수 있기에 참고할 만하다.
나) 누가 숙박비를 결제하였는지
위 살핀 CCTV 영상보다는 증거의 무게가 약하기는 하지만 숙박업소에 방문할 당시 누가 숙박비를 결제하였는지 여부도 실무적 판단요소 중 하나다. 다만 이는 누가 숙박비용을 부담하였는지 여부가 아니라 누가 프론트에서 결제행위를 하였는지가 더 중요한 것으로서, 만일 가해자가 이미 의식이 없는 피해자의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서 숙박비용을 결제하였다면 준강간 범죄뿐 아니라 절도죄도 추가로 성립될 수 있다.
다) 범행 후 피해자의 행태가 기록된 CCTV 영상
한편 범행 후 피해자가 어떤 태도로 숙박업소를 나갔는지 여부 역시 실무상 중요한 판단요소가 될 수 있다. 비록 성관계 당시 피해자가 패싱아웃 상태에 있었다 하더라도, 평소 호감이 있었고 이미 이루어진 성관계를 용인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는 관계에 있었다면 가해자에게 강간의 고의가 없었다고 평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비록 범행 전 CCTV에 의할 때 피해자가 패싱아웃 상태였다는 사실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퇴실할 때에는 가해자와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걸어나온 모습이 범행 후 CCTV에 기록되어 있다면 준강간 범죄가 성립되기 어려울 수 있는 반면, 피해자가 아침이 되기 전 가해자보다 먼저 숙박시설에서 퇴실하였고 퇴실하는 모습이 불안정하거나 허겁지겁 허둥대는 모습을 보인다면 준강간죄 성립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분명 합의하에 성관계를 하였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여성이 심신상실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이 이루어졌다는 고소를 하거나 또는 상대 여성이 블랙아웃에 따른 오해에 기초하여 고소를 하였다면 위와 같은 증거를 통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할 것인바, 피의자 입장에서도 위와 같은 판단기준과 실무적 증거를 잘 정리해둘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