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자연을 본 작은 사람의 단상
여행은 자연 속에 뛰어드는 일이라 믿는 사람들의 버킷리스트 상위권에는 그랜드캐년이 있을 것이다.
모든 곳이 큰 미국에서도 ‘Grand’라는 말이 붙은 곳이다.
가기 전에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호주의 블루마운틴 정도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랜드 캐년은 비교 대상을 찾았던 나 자신이 민망해질 정도로 거대했다.
그곳은 대륙 한복판이었지만 망망대해라는 말이 어울렸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 눈으로 볼 때 보다 차라리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볼 때가 실물 같았다.
수백 년 동안 몸집을 부풀린 나무도 손톱 끝에 자란 거스러미 정도의 존재감 하나 갖지 못하는 곳.
그곳을 설명하려면 한 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한 번은 할 말이 너무 많아진다.
누구나 미국서부를 가면 그랜드캐년을 보고 다녀온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중요한 건 미국 서부엔 그랜드캐년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Canyon(캐년)은 ‘협곡’을 뜻하는 단어다.
그랜드캐년 이외에도 미국 남서부에는 협곡이 널려있다.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널려 있다.
유타, 아리조나, 콜로라도, 뉴멕시코 주에는 다수의 국립공원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 국립공원들을 지도에서 연결하면 원 모양이 나와서 이곳을 ‘그랜드 서클(Grand Circle)’이라고 부른다.
여행기간에 따라 볼 수 있는 캐년의 숫자가 달라지는데, 가장 유명한 그랜드캐년은 무료 제공 식전빵 같은 느낌의 기본 옵션이다.
캐년을 둘러보는 투어는 보통 사막 위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시작한다.
여행사는 관광객의 일정에 따라 다양한 캐년투어 상품을 준비하고 하루 이틀짜리 관광상품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렌터카와 장비를 갖추고 일주일, 열흘, 한달씩 여행을 하기도 한다.
렌터카 욕심이 좀 낫지만 겨울에 혼자 산길을 운전하기는 좀 무리라고 판단해서 나는 7대 캐년을 보는 2박 3일짜리 투어에 참여했다.
캐년이라고 묶어서 말하니 일곱 개가 비슷할 것 같지만, 그 일곱은 무지개의 일곱 색만큼 다르다.
그랜드캐년(Grand Canyon)은 인간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자연 깊이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했다.
엔텔롭캐년(Antelope Canyon)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아름다움을 믿게 하며, 인간이 그 시간 속에서 함께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홀슈밴드(Horseshoe Bend)의 절벽과 강물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들의 강한 힘을 알게 했다.
글렌캐년(Glen Canyon)의 댐과 호수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는 없지만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게 했다.
코랄핑크샌드듄(Coral Pink Sand Dunes)은 모레와 바람 위에서 자연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촉감을 깨닫게 했다.
브라이스캐년(Bryce Canyon)은 땅과 흙만으로도 인간이 만들 수 없는 다양한 형상이 만들어짐을 깨닫게 했다.
자이언캐년(Zion Canyon)의 붉은색은 신들의 정원에서 인간은 나가라는 경고로 보이면서도 자연의 경이로움 속에서 질주하고 싶은 본능을 깨닫게 한다.
일곱 캐년의 공통점이라고는 더 많이, 오래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는 사실뿐이었다.
7대 캐년만으로도 자연을 방탕하게 즐길 수 있는데, 캐년 못지않은 장소가 또 있다.
일주일 동안 봐도 못 본다는 광대한 산악공원 ‘요세미티 국립공원(Yosemite National Park)’이다.
캐년투어가 라스베가스를 거점으로 삼는 관광이라면, 요세미티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점으로 잡는다.
요세미티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문에 방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간이 시작한 골드러시는 끝났지만 자연이 시작한 위대함은 여전히 그곳에 금보다 귀한 것들을 만들고 있다.
고 스티브잡스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맥북 바탕화면으로 삼았다고 말하면 그 티 없이 맑은 아름다움을 세속적으로 설명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의 국립공원답게 그 거대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보통은 다 돌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요세미티 계곡을 중심으로 몇 가지 포인트를 돌아본다.
요세미티 계곡은 요세미티국립공원 총면적의 1% 정도만 차지하지만 요세미티의 거대함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는 요세미티 관광은 1박, 2박짜리 캠핑도 많고, 새벽에 출발해서 밤에 돌아오는 당일투어도 많다.
만약 자연을 매우 사랑하거나, 여행기간에 제한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요세미티는 당일 일정으로 소화하고 캐년투어에 하루를 더 투자하는 편이 좋다.
그랜드서클에서는 여러 국립공원을 다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전혀 다른 풍경이 기다리지만, 요세미티 투어는 하나의 국립공원 안에서만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지루 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는 다른 계절에 다시 오고 싶었지만, 일행 중 대다수는 풍경이 조금씩 지루하게 느껴지는지 점점 차에서 내리지 않고 피곤해했다.
캐년투어는 대부분 절벽 가장 높은 곳에서 드넓은 자연을 관망하는 방식인데 비해, 요세미티투어는 높은 곳에서 보기도 하지만 그 절벽 아래로 직접 내려가서 숲을 걷고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는 수준의 단면만 보게 된다.
한순간에 많은 것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들은 아무래도 요세미티투어의 방식이 조금 더 지루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만리장성이나 베르사유궁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요세미티라는 자연의 으리으리함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아니, 사실은 아니다.
그랜드캐년도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이 짐작할 수 없는 커다란 것을 오히려 작게 보기도 한다.
그랜드캐년 위에서 아래를 보거나 요세미티 터널뷰에서 먼 곳을 보면 모든 게 평평하고 가까워 보이는 착시가 온다.
너무 높은 곳에서 낮을 곳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그 깊이를 짐작하지 못하고 착각에 빠진다.
사람은 참 작아서 진짜 커다란 세상을 마주 볼 용기가 없을 때 상대를 낮추고 별거 아니라고 주문을 외우며 자신을 부풀리고 싶어 한다.
허영은 모파상의 다이아목걸이와 루이비퉁 매장 앞에 늘어선 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교 대상 조차 되지 못하는 자연 앞에서도 허영심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자연이란 상대는 경쟁하기엔 미약한 나라는 존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연재해를 보면서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대가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연에게는 그냥 한번 해본 일에 지나지 않는데, 인간은 화낼만한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 벌하려는 생각조차 없는데 두려운 나머지 인간 혼자 겁을 먹고 지레짐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란 참 변화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혼자서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