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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Oct 26. 2023

고작 이곳에서, 어떻게 그런 기획을?

세 번째 직업, 문화기획자의 사연

올해 들어 부쩍 보틀북스를 찾아주는 이들이 많다. 특히 학교, 도서관과 교육청에서 주로 찾아온다. 10명만 들어와도 북적북적 거리는 공간이기에, "장소가 많이, 정말로 협소합니다"를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들어서자마자 놀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8평'이라고 말로 듣는 숫자는 무감각하다. 공간에 직접 발을 들이 고나서야 이 '8평'의 규모가 체감되는 것이다. 잠깐의 이동을 위해서 서로가 어깨를 부딪혀야만 하고, 옆사람을 위해 무릎을 힘껏 오므려 공간을 확보하거나, 행동을 최소화해 몸의 부피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렇게 옹기종기, 오밀조밀 모이면 그제야 나는 강의를 시작한다.


열악한 서점 이익구조에서 어떻게 생존을 이어나갈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매달 20여 개가 넘는 독서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지, <일일 책방지기 고용 프로젝트*> <쓸데없는 짓 좀 해, 프로젝트**> 등의 획기적인 행사를 기획할 수 있었는지. 내 눈앞에 침이 튀어나가는 것을 직접 보면서 나는 열 띄게 이야기를 한다. '강의'니까, 주어진 시간은 다 채워야 하니까 여러 미사여구를 섞어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창조해 냈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처절함'과 '자유' 그 두 단어만이 전부였다. 


* 유명 작가, 지역민 등을 일일 책방지기로 고용하는 프로젝트

** '쓸데없음'을 정하는 기준을 부수는 프로젝트로, 타인이 정한 그 틀을 벗어나 무모한 도전, 무의미한 토론과 논쟁, 무효율적인 일들을 도전해 봄으로써 무모함이 만들어내는 색다름,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는 일들의 묘미, 우직함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목격해 보자는 취지의 행사


'처절함'은 피동력이었다. 생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발악했고, 이 공간을 지키고 싶어서 무모해졌다. 생존을 위한 버둥거림은 여러 활동들을 하게 만들었다. 처절함이 나를 지금 여기까지 이끈 것이다. 피동적인 힘이었지만 그 여정은 행복이었다. 문화기획자는 상상을 구현하는 자다. 머릿속으로만 떠올랐던 여러 이미지들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일은 즐겁다. 특히 즐거운 이유는 '자유로움'에 있다. 행사에 몇 명이 참여했고, 몇 개의 프로그램을 준비했다는 둥 모든 것을 수치화시켜 버린 정량화된 결과물에서 벗어나 이런저런 도전을 할 수 있는 자유에 있다. 그리고 이런 자유가 오히려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곤 한다.


학교나 도서관, 기업 등에서는 담당자가 원하는 행사나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 예산의 정해진 목적, 연초에 계획했던 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고정된 틀, 관례상 해왔던 것들의 강력한 명분 때문이다. 하지만 1인 문화기획자이자, 운영자이자, 최종 결정자인 나는 다르다. 내가 기획하고, 내가 컨펌하고, 내가 추진하고, 내가 반성한다. 세웠던 계획도 상황을 보고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행사를 기획했는데 생각보다 호흥도가 낮다? 그러면 행사를 없애버릴 수 있다. 예산을 아껴 써서 돈이 남았다? 그러면 원하는 프로그램을 하나 더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관공서는 다르다. 계획했던 것의 '계획대로의 이행'이 제일 좋다. 예산의 남용보다 더 나쁜 것이 불용이다. 계획의 결과물보다 중요한 것은 추진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까지 자리해 준 많은 분들에게 '자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게 된다. 


강의가 마치고 나면 공간은 조금 외로워진다. 북적거리던 온기가 썰물 빠지듯 빠지고 혼자 멍하니 앉아있는다. 강의 이후 몰려오는 탈력감을 느끼며, 나의 언행을 곱씹어본다. '아, 그렇게 말하지 말걸'이라고 후회도 하며, '이 말은 괜찮게 잘했네, 기억해 둬야지'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문화기획자로서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언변이 제법 늘었다. 긴장감이 없어지고, 말재주가 는 '나'는 과거와는 확연이 달랐다. 나도 이런 나의 모습이 간혹 낯설다. 그런데 이 낯섦이 반갑다. 나는 진심으로 생존하고 싶었구나, 투쟁하는 매일을 잘 보내었구나, 우직하게 하루를 잘 쌓아 올렸구나. 오늘 하루, 참 대견하네 '나'야.


언젠가 창원 MBC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대기실에서 오로지 대본에만 집중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 아나운서는 방송이 시작하자마자 "이야기를 들어보니 많이 긴장하셨다고요"라고 서두를 꺼냈다. 긴장해서 실수할 수 있음을, 목소리가 불안정할 수 있음을 청취자에게 미리 알려주는 역할과 함께 나에게 편안함을 주려는 말이었지만 나는 되려 당황하고 말았다. '어라, 나 하나도 긴장 안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이 직업에 이제 경력과 연륜이 생겼음을. 이게 정말 나의 '직업' 중 하나가 됐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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