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남편'이라는 직업
고함을 지르는 남편을 뒤로하고 집을 뛰쳐나온다. 집을 나와 갈 곳이 있다는 것, 남편이 없어도 밥은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이나 위안이 된다. 수중의 돈은 오만 원 남짓, 결국 돌아갈 곳은 집 밖에 없음은 비장한 내 마음을 허탈하게 만든다. 남편과 싸운 오늘, 나는 '아내'도 하나의 직업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아내'라는 직업에는 여러 업무가 부여된다. 집안을 깨끗하게 정돈할 것, 자녀를 잘 양육할 것, 살림에 어떤 식으로든 보탬이 될 것(효율적으로 장을 본다거나, 돈을 벌어온다거나) 기타 등등. 이 모든 것을 '집안살림'이라고 통칭하며, 살림을 잘 꾸리느냐 못하느냐가 '아내'라는 직업의 성과가 된다. 그중 압도적으로 과중하고, 업무 스트레스를 주고 일은 '청소'다.
나는 청소를 할 때마다 마음이 곱게 써지지가 않는다. 쾅쾅 소리를 내며 물건을 정돈하며, 달그락- 쨍! 쨍! 소리로 설거지를 한다. 왜 청소는 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까? 왜 청소는 고통스러울까? 밖에서의 일은 이렇지 않다. 스트레스는 있을지라도 이와 같이 마음이 버겁지는 않았다. 집안일은 해도 티가 안나는 일이었다. 보상을 주지도 않았으며, 도로 손쉽게 원상복구 된다는 점에서 괴롭다. 집안일을 혼자 하고 있으면 억울한 느낌마저 든다. 집안일을 오래 해서 노하우가 생기고, 경력이 생겨도 반갑지 않다. 쌓인 경력과 연륜만큼 내가 전담해야 할 것 같은 위기감마저 느끼게 만든다. 이미 식사준비가 나의 전담 업무가 되었기에. 육아를 이유로 영업시간을 단축했고, 그 단축된 시간이 '여유'라는 명분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더 살피게 만든다. 그 '여유' 시간에 청소를 해야 하고, 그 '여유' 시간에 밥을 해야 한다. 그렇게 축적된 시간은 '식사준비'라는 역할을 오롯이 혼자 담당하게 만든다.
억울해하며 울고, 스스로가 대견해서 웃고, 고생한 내가 안쓰러워서 마음 간다. 그렇게 감정의 폭풍 속에 서 있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감정을 갈무리하고 나자 남편의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집안일을 안 하는 줄 아나!" 그래, 그제야 들리기 시작한다. 나와 같았던 남편의 마음이. 그 또한 티 나지 않은 집안일을 하며 괴로웠고, 사는 게 맘 같지 않아서 힘들었다. 그도 '남편'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이다. 나와 같이 여러 역할을 떠맡은 사람일 뿐이었다. 집안을 깨끗하게 하고, 자녀를 키우고, 살림에 어떤 식으로든 보탬을 주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에너지는 한정적이다. 대부분의 에너지를 밖에서 소진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나머지 에너지를 가족을 위해서 써보려 해도 집안일을 하나만 하고 나면 탈진상태에 접어든다. 우리는 서로를 위할 기력이 없었다. 그저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