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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Jul 18. 2016

부산 영도다리 너머

근대로 다리 놓은 부산, 그 부산스러움 속으로

색색이 등산복 차림의 구경꾼들로 다리 위는 이미 빼곡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에 저마다 아는 구절을 따라 부르며 한껏 흥을 돋우는데 마침내 사이렌이 울리고 차도, 사람도 모두 발이 묶인다. 이윽고 다리가 하늘을 향해 밑바닥을 보인다. 옛 영도다리의 진풍경이 되살아난 영도대교. 15분가량의 도개跳開 시간, 다리 위에서 자유로운 것은 갈매기뿐이다.





가마솥 모양을 닮은 산으로 포근히 둘러싸인 조그맣고, 조용했던 어촌 마을 부산포釜山浦가 이리 큰 항구도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경제도시,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문화도시로 성장한 배경에는 1876년 강화도조약이 있다. 일본의 강압에 불평등하게 맺은 조약의 첫째 항목이 ‘조선은 부산과 원산과 인천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부산은 식민지 항구도시이자 근대도시로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데 그 근거지가 부산항 앞바다 영도다리 너머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으로 이어지는 부산의 원도심이다.      


영도구 봉래4동에서 바라본 부산의 원도심. 산 중턱까지 퍼져나가는 불빛이 부산 특유의 밤 풍경을 그려낸다.



탄성과 탄식이 한데 뒤섞인 영도다리 아래

일제는 한창 대륙 침략을 도모하고 우리의 물자를 끝없이 수탈하던 때에 부산 내륙과 부산항 코앞의 영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 영도다리이다. 큰 배가 다리에 걸리지 않고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도록 다리 상판 한쪽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설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連陸橋이자 다리 한쪽이 올라가는 도개교跳開橋로 개통한 것인데 일제의 속뜻이 어떠했든 당시 사람들에게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절로 벌어지는 부산 제일의 구경거리였다. 하루 여섯 번, 도개 하는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로 영도다리 근처는 늘 북적였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유는 달랐다. 해방의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남으로, 남으로 밀려온 피란민들은 피붙이와 헤어지며 이곳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 약속을 했었다. 겨우 닿은 다리 위에서 보고픈 얼굴 찾아 몇 날 며칠이고 서성여보지만 찾을 수 없었던 피란민들의 먹먹한 표정이 파도 위로 일그러지기 일쑤였단다. 그네들의 허탈한 마음을 달래어주는 것은 다리 아래로 줄을 이은 국밥집과 점집이었다. 이름하야, 점바치골목. 점바치는 점쟁이의 경상도 사투리로 영도다리 주변에 무려 50군데가 넘을 만큼 점집이 성행했을 때 이 골목을 그리 불렀다고 한다. 


여기저기 탄성과 탄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던 영도다리는 시설은 낡고, 교통량은 늘어난 데다 영도로 들어가는 수도관을 다리에 붙여 연결함에 따라 1966년 9월 도개를 멈추었다. 본래 부산대교라는 명칭도 부산 개항 100주년을 맞아 영도다리 옆으로 새로 만든 현재의 부산대교에 내어주었다. 이후 안전성의 문제로 철거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조금씩 유명무실의 길을 걷는 듯했던 영도다리는 피란민들을 끌어안았던 부산의 품이자 우리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인정받아 수년간의 복원을 거쳐 2013년 11월부터 영도대교라는 새 이름을 달고 다시 도개를 시작했다. “아이고, 살다 보이 이래 영도다리 다시 열리는 걸 보네.” 관광버스를 대절해 영도다리 구경에 나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혼잣말에 괜스레 감격스러워진다.


옛 번영은 없지만 여전히 간판을 걸어놓고 있는 점집도 눈에 띈다. ‘사람 찾읍니다’라는 입간판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 옛날에도, 지금도 정말로 여기서 그리운 이를 찾아준다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언젠가는 꼭 찾을 수 있다는 제 스스로의 믿음을 다지기 위해 이 문턱을 넘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배탈이 나면 약이나 주사보다 엄마 약손, 할머니 약손을 찾곤 했던 것처럼.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서 다시 미국문화원으로, 오랜 기간 우리 것일 수 없었던 이 근대문화유산은 1999년 우리 정부에 반환됐다.



사람 사는 냄새가 여전히 묻어나는 부산의 원도심 골목골목

부산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영도다리 너머 부산의 원도심은 대개 자갈치시장에서 신선한 해산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BIFF 광장과 광복동 국제시장 골목골목을 돌며 쇼핑을 하고, 용두산공원에 올라 부산항을 조망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몰라서 그렇지 그 사이사이 근대의 흔적이 제법 많다. BIFF 광장에 위치한 남포동 CGV 영화관 뒷골목의 청풍장과 소화장이 대표적이다. 곧 철거를 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일 만큼 허름한 연립주택인데 이 건물이 들어서던 1944년에는 부산에서 내로라하던 사람들이 입주했던 부산 최초의 공동주택이다. 한국전쟁 때에는 국회의원 숙소로 이용되었을 만큼 최고급이었던 곳. 그 앞을 한참 서성이는데 겉보기가 초라해졌다고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을까 싶다. 시간이 흘러 초라한 차림새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곳이 최고의 보금자리인 누군가가 살고 있기에. 


부산의 원도심 일대에는 익히 알려진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등 오래된 시장이 많은데 청풍장, 소화장과 가까운 곳의 깡통시장 역시 놓치기 아까운 곳이다. 사실 깡통시장은 국제시장 길 건너편에 위치한 부평동시장 내 수입품 골목의 별칭이다. 부평동시장은 역사가 무려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시장이다. 전통적인 오일장이 아니라 매일매일 문을 여는 장이 생긴 것이다. 별의별 것을 다 팔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미군의 군수물자가 PX와 얌생이꾼들에 의해 이곳 부평동시장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그중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통조림 형태의 품목이라고 한다. 몰래 빼내기도 수월했을 테고 모두가 굶주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게다. 전후에도 일본을 오가는 보따리상에 의해 깡통시장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지금도 양주, 양담배를 비롯하여 화장품, 염색약, 커피, 과자, 각종 소스류 등 물 건너온 제품들이 시장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론 요즘에는 대부분 정식으로 수입하는 물품을 거래한단다. 수입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좋지만 팥죽, 비빔당면, 유부전골 등 골목골목 새로이 등장하는 깡통시장표 주전부리 때문에 한 번 발을 들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장을 맴돌게 된다.


깡통시장에서 다시 언덕진 곳으로 큰길을 건너면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낮에 항구나 시장에서 하루 벌이를 하던 피란민들은 부평시장 뒤쪽 언덕배기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피란민들의 일터와 천막집이 있는 언덕길 중간 즈음에 위치하고 있는데 배는 곯아도 정신을 곯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부산 사람, 피란민 할 것 없이 천막 교실 아래 헌책을 구해다 공부했다던 옛이야기는 허툰 무용담이 아니다. 그 옛날 헌책방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지만 때 묻고 먼지 먹은 헌책에 당시의 향수가 배어 있음은 두 말할 것이 없다.      


켜켜이 쌓인 책 더미 속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그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부산의 근대를 한눈에 담아

보수동 책방골목을 기점으로 동쪽에는 일제강점기에 경남도청사, 한국전쟁 때에는 임시수도 정부청사 이후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검찰청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있고, 서쪽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미국 문화원과 미국 대사관으로 사용되었던 부산근대역사관이 있다. 모두 근대문화유산이기도 하거니와 부산의 근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단장해 부산 원도심을 거니는 근대 여행에 충분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용두산공원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 보수동 책방골목 너머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부산지방기상청까지 가파른 길을 오른다. 용두산을 굽어보는 위치에 있지만 삐죽 솟은 용두산 타워와는 눈이 맞는다. 이곳 역시 1930년대 근대문화유산이다. 옆에서 보면 딱 배 모양을 하고 있는데 100여 년 전의 기상청이라. 생소하면서도 놀랍고 반갑다. 앞이 탁 트인 언덕 꼭대기라 그런지 바람이 꽤 세차다. 때문일까? 멀리 보이는 부산항을 향해 곧 나갈 듯한 위풍당당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산허리를 둘러가며 파란 물통을 쓰고 있는 부산의 달동네와 용두산공원, 그리고 부산항까지 부산의 원도심이 참말로 한눈에 내다보이는 그곳에서 차분히 숨을 고른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이곳이야 말로 가장 부산스러운 부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7월호 '부산 영도다리 너머'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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