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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Sep 01. 2016

인천 개항장 너머

개항장 인천에 남아있는 이방異邦의 흔적


인천으로 향하는 지하철 1호선은 차창 밖으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어서인지 서울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나들이 기분을 내게 했다. 그렇게 도착한 경인선의 종점 인천역. 낯설었다. 인천역의 또 다른 이름 ‘차이나타운’이 일러주듯 역사驛舍를 나서기 무섭게 이방의 기운이 시야를 압도한다. 그간 해외 여행길에서 몇몇 차이나타운을 가보았지만 우리 땅의 차이나타운은 반나절 먹고 구경하는 여행지로 느껴지지가 않더라. 

    



인천을 빼놓고 우리나라 근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치가 역사의 뒤꼍으로 물러나고 1883년 열강에 의해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인천은 서구의 근대 문물이 들어온 길목으로 외국 영사관이 들어서고, 각국 상인들이 자리를 잡아 조계租界를 형성하면서 국제도시로 뜻하지 않은 급변을 당한다. 인천역 일대에 그 시절의 자국이 남아 있다. 1900년에 짓기 시작해 1908년에 첫 기적을 울린 인천역은 우리나라 철도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인천항을 통하는 물자를 효율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부두를 따라 선로를 놓았다. 자연히 부둣가보다는 인천역을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흩어졌다. 6·25 전쟁으로 소실된 역사는 1960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소도읍의 간이역을 떠올리게 할 만큼 광역시 소재의 역사라 하긴 어쩐지 초라해 보이는 외관은 그 때문이다.   



차이나타운에 들어서는 순간 이방인이 된다

인천역사가 초라해 보였던 것은 대로 건너로 마주 보이는 차이나타운 패루牌樓가 분명 한몫을 한다. 이전에도 이 땅에 중국 상인들이 드나들긴 했지만 1884년 지금의 차이나타운 일대 선린동이 중국 조계지로 설정되고, 그 해 청국 영사관이 세워지면서 화교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후 1889년 중국 산동성에서 일어난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피해 우리나라로 건너 온 중국인들 또한 인천으로 모여들면서 바야흐로 인천은 화교의 근거지, 우리나라 최초의 차이나타운으로 기반을 닦게 된다. 차이나타운에는 인천역 맞은편 정문에 해당하는 중화가를 비롯하여 인화문, 선린문 등 총 3개의 패루가 있다. 2000년 중국 산둥반도 북쪽 끝에 위치한 항구도시 웨이하이威海 시에서 한중 우호 교류 차원에서 기증한 것이다. 패루는 마을 입구나 대로를 가로질러 세운 탑 모양의 중국식 대문을 가리킨다. 으리으리한 제1패루 중화가를 통과하면 붉은색 한자어 간판과 홍등이 도열한 차이나타운이다. 


월병, 공갈빵, 옹기병 등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주전부리를 파는 상점에 꽤 많은 이들이 줄을 서 있다. 그러나 차이나타운의 백미는 역시 짜장면이다. 조선의 상권을 장악한 화교 마을에 중국 요릿집들이 번창한 것은 당연지사. 지금도 이곳 요릿집 대부분은 화교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단다. “우리 진짜 화교가 하는 데야. 우리 짜장면 맛있어.” 가게 문을 열고 나와 손짓하는 이들의 환대는 거리를 더욱 활기차게 만든다. 지금에야 유명 관광지가 되었지만 지역 토박이라는 중년의 사내는 그의 유년 시절만 하더라도 감히 지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만큼 딴 세상이었다고 기억했다. 적어도 차이나타운에서는 한국 사람이 이방인이 되는 셈이다. 현재 짜장면박물관으로 단장한 ‘공화춘共和春’은 일제강점기 최고급 요리점이었다. 회색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주칠과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한 옛 공화춘 건물은 골목길을 따라 이웃한 중국식 점포, 우리나라 유일의 중국식 사찰 ‘의선당義善堂’, 청나라 정원 양식을 본 따 만든 공원 ‘한중원韓中園’ 그리고 언덕배기 자유공원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소설 삼국지의 명장면을 감상할 수 있는 ‘삼국지 벽화거리’와 더불어 차이나타운 특유의 정취를 형성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에 이르는 오르막에 삼국지의 주요 장면을 타일로 만들어 조성한 삼국지 벽화거리가 있다.
월병이나 공갈빵 등을 파는 차이나타운의 가게는 줄을 길게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사람들로 들끓는다.
1912년 문을 연 후 개항기 인천 선린동에서 성업했던 중국 요릿집 공화춘 건물이다.
차이나타운이라는 팻말이 없으면 중국 본토로 착각할 만큼 중국색이 짙게 밴 차이나타운 계단을 관광객들이 오르고 있다.
인천역과 마주 보고 서 있는 웅장한 석조문 제1패루는 차이나타운 정문 역할을 한다.



강요된 경계 너머

골목길의 분위기는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을 기준으로 확 바뀐다. 돌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에 중국식 석등, 오른쪽에 일본식 석등이 나란한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왼쪽이 청국 조계, 오른쪽이 일본 조계였다. 자유공원으로 연결되는 계단 위쪽에는 중국 청도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인천항을 바라보고 있다. 


오르막을 따라 조금씩 녹음이 짙어지는데 사뭇 다른 인상의 두 건축물이 호기심을 유발한다. 하나는 회칠하여 뽀얀 인상을 주는 제물포구락부이다. 근대기 인천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사교실을 비롯하여 당구장, 독서실 등 사교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비탈진 데 지어서인지 2층 건물이지만 상대적으로 1층은 낮고, 2층 천장은 높은 것이 인상적이다. 제물포구락부 맞은편 기슭에는 한옥 한 채가 들어앉았다. 일본인 사업가 코노 다케노스케의 별장이 있었던 자리다. 해방 후 동양장이라는 레스토랑, 송학장이라는 댄스홀로 사용되던 것을 인천시에서 매입, 한옥으로 개축하여 인천시장 공관으로 사용하다 현재는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으로 문을 열어두고 있다. 사료가 꽤 많다. 누구든 와서 열람할 수 있다고 했다. 책장에 빼곡한 자료보다는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 더 눈이 간다. 풍수에는 무지하지만 나도 모르게 ‘이 좋은 터가 꽤 오래 시달렸구나’ 혼잣말을 뱉는다.


언덕 정상부에 너르게 조성된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이름이 4차례 바뀌었는데 그 변화 속에 근현대사가 녹아있다. 개항 5년 후인 1888년 처음 공원이 조성될 때에는 각국 공동 조계 내에 위치해 있었기에 각국공원이라 했다. 강점기에는 서공원, 해방 후에는 만국공원이라 하던 것을 6·25 전쟁 이후 1957년 공원 내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우면서 다시 자유공원이라 바꾸게 된다. 보이진 않지만 공원에 시간의 경계가 축적된 셈이다. 그러나 현장학습을 나온 것인지 교복 차림의 학생들부터 삼삼오오 그늘 아래서 소일하는 어르신들까지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오늘의 공원 풍경은 이름 그대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일본 제18은행이 해외에 세운 최초의 지점
일제는 제물포 항구를 통하는 물자를 수월하게 실어 나르고 일본인 거주지 확장을 위해 응봉산 자락에 홍예문을 냈다



무엇이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을까

자유공원이 위치한 응봉산 자락을 관통하고 있는 홍예문虹霓門을 지나면 내동 성공회성당이다. 우리나라 성공회의 역사는 1890년 영국 해군 종군시부였던 코프 주교와 내과의사 랜디스가 제물포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코프 주교는 인천 송학동에 성미카엘 교회를 세워 선교활동을 했으나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1956년 랜디스가 의료구호를 전개했던 누가병원 자리에 다시 지은 교회가 현재의 내동 성공회성당이다. 유럽의 중세 건축물을 떠올리게 하는 석조가 매우 견고한 태를 낸다. 언덕 아래 제물포 방향으로 눈길 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목을 끄는 건축물이 있다. 붉은 벽돌, 아치형으로 된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의 창문, 8각의 종 머리 돔을 얹은 종탑 등이 한층 화려한 인상을 주는 답동성당이다. 1887년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빌렘 신부가 제물포로 들어와 선교활동 시작한 후 1897년에 지금의 성당을 축성했다. 포교布敎에도 분명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개항과 일제의 탄압, 전쟁의 소용돌이까지 비정상적인 일련의 사달에 고스란히 노출된 사람들에게 종교의 울타리가 심신의 위로가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개항장 너머 근대의 발자국을 따라 땀 흘리며 다닌 나에게 위로가 된 것은 따로 있었다. 차이나타운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천의 구도심을 형성하고 있는 해안동의 인천아트플랫폼이다. 개항 후 인천항으로 쏟아졌던 막대한 양의 물류를 감당할 길이 없어 갯벌을 매립해 수 십 채의 창고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버려진 산업유산이 되나 했던 것이 리모델링을 거쳐 버젓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술가들이 머물며 창작활동을 펼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시, 공연,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창고라지만 붉은 벽돌로 큼직큼직하게 지어 올린 건물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으니 꽤 근사하다. 개항장의 역사를 속속들이 몰라도 그만이다. 아트플랫폼의 프로그램에 애써 기웃거리지 않아도 괜찮다.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파는 중국식 밀크티 ‘전주나이차珍珠奶茶’ 한 잔을 들고 인천아트플랫폼 벤치에 앉아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는 것만으로 개항장 너머에 스민 문화적 감수성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철도 역사의 시작점이었던 인천역은 인천 개하장 산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개항기 인천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설계된 제물포구락부.
내동 성공회성당은 화강암으로 쌓은 중세풍 석조이지만 머리엔 기와를 쓰고 있다.
근대기에 갯벌을 매립하여 세웠던 창고 건물. 인천시는 이 산업 문화유산을 활용하여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했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9월호 '인천 개항장 너머'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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