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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Feb 07. 2017

풍요가 흐르던 포구에 세월도 흐르고 흘러

나주 영산포

호남의 젖줄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보기만 해도 배부른 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나주. 저만치 아래 남녘이지만 한겨울 강바람은 여지없이 맵다. 그 바람을 가르며 들어선 영산포에는 꽤 오랫동안 시간이 멈춘 듯 빛바랜 자리가 수두룩한데. 옛 영화는 온데 없이 사그라졌지만 그 기억을 품은 영산포 사람들의 마음씨는 후했다. 글 서진영(자유기고가), 사진 임승수(사진가)     


홍어로 이름난 영산포다.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영산교를 넘어가는데 저 멀리서부터 홍어집 간판이 눈을 틔운다. 크고 작은 섬이 흩뿌려진 남도, 그중에서도 흑산도와 그 주변 섬사람들이 영산강을 타고 영산포로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 가득한 것이 홍어였다. 바다에서 내륙 깊숙이 일주일여를 들어오는 사이 홍어는 발효가 되어 자연스럽게 코끝을 알싸하게 만드는 ‘삭힌 홍어’로 자태를 바꾸었으니 그 맛이 임금님께 진상할 만큼 별미였다고. 이 역사가 고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산포라는 지명도 흑산도 앞 영산도 섬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 붙은 지명이라 전해진다. 그때로부터 나주 영산포는 오랫동안 영산강 줄기 따라 숱한 물자와 세곡이 모였다 흩어지는 남도의 중심이었다.      




여전히 이정표가 되어주는 불 꺼진 등대 너머로

영산포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무렵만 하더라도 바다에서 갓 낚아 올린 수산물과 이를 염장한 젓갈이며 염전에서 거둔 소금 등을 실은 배들이 수없이 드나들었던 포구마을이다. 어디 그뿐인가. 강 너머로는 비옥한 나주평야에 해마다 풍년이 드니 우리를 옥죄었던 일본인들이 1987년 목포 개항과 더불어 이 영산포를 전라도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서해 바다에서 영산강을 타고 가장 깊숙이 들어온 포구 영산포는 영산강 뱃길의 종점인 셈이다. 자연스레 포구 일대에 오일장이 들어섰고, 영산포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은 소위 긴자銀座 거리라 부르는 상점가를 형성했다. 판이 점점 커져가는 형국에서 1914년에는 강 위로 다리를 놓고 그 이듬해 1915년에는 등대도 세우게 된다. 어둔 밤 그 많던 배들이 영산포 등대가 뿜는 불빛 따라 길을 더듬었다.

 

바다 등대와는 어딘가 분위기가 다르다. 아담하다고 해야 할까. 영산포 등대의 몸통에 눈금 표시는 등대 기능과 함께 영산강의 수위를 관측하는 데에도 등대가 한몫을 했던 지난 역사를 일러준다. 그러나 점차 육로 교통이 발달하던 시기에 영산강 상류에 댐이 건설되고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완공되면서 영산강 뱃길이 끊기고 등대의 불도 꺼지게 된다. 다만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이곳이 영산포라는 이정표 역할을 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강가 등대로 당시 영산강과 영산포의 영향력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일제는 강과 들을 넘나들어 풍족했던 영산포의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우체국이며 은행이며 여러 기관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토지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영산포출장소다. 등대에서 하구 방향으로 얼마 가지 않아 1916년에 설치한 출장소 사무실 건물 중 당시 영산포 출장소의 문서를 보관했던 문서고가 남아 있다. 문서고는 현재 개인 소유다. 250년쯤 되었다는 팽나무를 가운데 두고 영산나루라는 간판 안에 문서고와 레스토랑, 펜션, 전통찻집이 소복 들어앉았다. 문서고는 영산나루에서 영산재라는 이름의 차 문화 교육장과 연회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옛 문서고의 흔적은 없지만 어딘가 마룻바닥이며 창문과 천장 모양새에서 그 시절의 분위기가 묻어난다.

 

문서고 앞의 전통찻집 성류정 또한 문서고와 같은 시기의 건축물을 개조한 것이다. 문서고가 붉은 벽돌로 만든 2층 양식 건물이라면 성류정은 목조로 지은 단층의 일본식 주택이다. 우리의 전통 목가구와 규방 공예품이 유럽의 고가구와 찻잔 세트와 한 데 어우러지는데 어색하지가 않다. 주인장의 솜씨도 있겠거니와 아마도 100년 전 전통사회와 서구 문명이 뒤섞이던 근대기의 모습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일 게다.      




영화映畫에 담긴 영화榮華로웠던 날들

영산포의 포구마을 영산동은 강변에 낮은 언덕 두 개를 넘나든다. 언덕과 언덕 사이 낮은 땅에 길게 뻗은 대로변으로 홍어집들이 빼곡한데 여기에서 뻗어간 골목골목으로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형성한 시가지 구조와 그 당시에 지은 일본식 가옥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홍어거리 초입부터 범상치 않다. 분명 삼화홍어 간판을 내건 홍어집인데 2층 건물 머리맡에는 대성상회와 태극서점이라는 상호명이 선명하게 칠해져 있다. 이 집에서부터 언덕배기 희망참기름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은 앉은뱅이 죽집들이 늘어섰던 죽전골목이었다. 올해 쉰아홉으로 영산포에서 나고 자랐다는 삼화홍어 주인장 역시 죽전골목에서 팥죽을 사 먹었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 희망참기름 집도 구순의 할아버지가 그의 어머니 때부터 온 동네에 고소한 기름내를 퍼뜨린 노포. 최근 나주시에서 죽전골목을 근대거리로 단장하는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골목에 예전 모습을 되찾아주게 되었는데 그 시작이 한 지붕 아래에 있었던 대성상회와 태극서점 간판이다. 따로 제작해 단 것이 아니라 본래 그랬던 것처럼 상호를 벽면에 칠했다. 군더더기 없이 검게 칠한 옛 상호가 그 어떤 화려한 네온사인보다 강렬하다. 

 



죽전골목을 지나 10여 개의 정미소가 밀집해있던 정미소거리까지 이어지는 지금의 영산1길은 일제 때에 가장 번화했던 원정통元町通이다. 이창동으로 자리를 옮기고 이름도 풍물시장이라 바꾼 오일장도 본래 이 자리에 펼쳐졌다. 마을 곳곳 여인숙 간판 또한 번성했던 한 때를 그려보게 하는데 옛날 영화 포스터가 그려진 구 영산포 극장에 이르러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군의 아들>을 이 일대에서 촬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난 40여 년 문집을 운영했다는 어르신이 일제 때의 집 자리며 정미소 자리를 소상히 일러준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나락 실은 달구지들이 무수히 이 길을 지나 정미소를 드나들었다고. 

 

그러나 배부른 이는 따로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 마당 너른 집은 일제강점기 나주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소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의 집이다. 그는 농지뿐만 아니라 조선가마니주식회사, 조선식산주식회사, 영산포운수창고회사 등 기업 경영에도 손을 뻗어 부를 축적했다. 이 집은 1935년경에 일본에서 모든 건축자재를 들여와 지은 것으로 본래는 일본식 정원까지 갖춘 대저택이었으나 오랜 시간 방치되면서 본채와 창고 정도가 남았다. 구로즈미 이타로를 우리식의 한자로 표기하여 현재는 흑주저태랑 저택이라 부르는데 최근 원형을 복원, 근대 포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숙박형 포구스테이 시설로 단장하고 있다. 

 

홍어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대로변에도 일본풍의 건물들이 꽤 있다. 잉글랜드화점 간판이 그대로 달려 있는 분식집과 삼천리자전거 역시 일제 때부터 자리를 지킨 영산포의 터줏대감. 부친 때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삼천리자전거 주인장은 지금은 창고로 쓴다는 2층으로 기꺼이 안내한다. 모양이 비슷해도 당시 일본집을 흉내 낸 것과 일본 사람이 직접 지은 집에 차이가 있다며 다다미 아래 왕겨를 채운 바닥과 3층 건물만치 높다란 2층의 천장 등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겉보기에는 시멘트 집 같지만 속은 모두 나무를 짜 맞춘 목조이고, 벽도 대나무에 새끼줄 같은 것을 엮어 짚을 넣은 흙을 발라 오래됐지만 지금까지 탄탄하다고. 

 

영화로웠던 날들은 옛 일이 되어버렸지만 영산포에는 그 시절의 흔적과 이야기가 여전히 차고 넘친다. 번듯한 근대문화유산 푯말을 달고 있지 않아도 꼬불꼬불 골목길을 걷다가 마주하는 풍경들이 어딘가 모르게 속을 아련하게 할 만큼. 넉넉한 땅의 기운을 받아서일까.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낯선 이에게도 반갑다 하며 그들의 기억을 나눠주는 영산포 사람들 또한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 길이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5년 2월호 '나주 영산포'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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