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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Jan 06. 2017

서울 교남동

성곽길에 스민 지난 100년의 애수哀愁


서울에서는 바쁘고 빠른 것이 참 익숙하다. 길가의 사람도, 길 위의 차도 하나같이 바쁨 일색이니 시시때때로 시침마저 빠르게 달음질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대문 가운데 하나이나 역사의 부침 속에 ‘돈의문 터’ 표석만이 8차선 대로를 바라보고 있는 새문안길의 풍경도 다르지 않은데, 바로 그 자리에서 언덕길을 따라 교남동 골목길을 걷다 보면 사뭇 다른 시간의 결이 그 길 위로 포개어진다.




구한말 사대문 안으로 전차가 다닐 때만 하더라도 도성 안팎을 연결해주던 성문은 물론이고 성문 양쪽으로 자락을 펼치던 성곽 또한 무탈했다. 그런데 꼭 100년 전이다. 1915년 3월, 일제는 도로를 넓힌다는 명목으로 도성의 서쪽 대문이었던 돈의문을 헐고 길을 냈다. 돈의문은 헐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경매에 붙여 당시 쌀 17가마에 준하는 단돈 205원에 땔감용으로 팔려나갔다. 돈의문이 헐린 자리에 새로이 닦은 길이 지금의 새문안길이다. 

 

새문안길 남쪽에 자리한 경운궁 일대 정동에 서양 공관이며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 등 근대기관들이 밀집했던 것과 달리 새문안길 북쪽에 위치한 경희궁 일대 교남동은 집이며 길이며 모든 터전을 조선인들이 제 손으로 직접 다듬어나갔다고 한다. 사직터널로 이어지는 언덕배기 군데군데 옛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고,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수없이 잔가지를 뻗고 있는 지금의 풍경은 그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시간을 기억한다

돈의문 터에서 언덕길을 몇 발 오르지 않아 강북삼성병원 앞마당으로 이어지는 길목, 분명 병원 건물인데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눈에 띈다. 김구 선생의 마지막 순간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경교장이다. 신탁통치반대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남과 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자주 통일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던 이곳에서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주한미군방첩대 요원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본래 건물은 일제강점기 금광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했던 최창학이 개인 저택으로 지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몰릴 것에 대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공간이자 김구 선생 그리고 임정요원들의 숙소로 내어주었다. 김구 선생 서거 이후 경교장은 몇 차례 주인이 바뀌어 종래에 강북삼성병원의 일부가 되었다. 한때 병원시설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경교장 전체를 복원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단장하였다. 그날 선생이 앉아 있었던 2층 창가, 창문에 난 총탄 자국이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깨어진 것은 유리창만이 아니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던 그의 소원과 둘로 나뉜 나라가 하나 될 수 있었던 기회 또한 깨어졌다. 서글프고 쓰라린 역사의 현장을 마주하는 것이 기꺼울 리 없지만 잊어서도 안 될 일임은 분명하다. 

 

묵직해졌던 기분을 찬바람에 깨우고 다시 언덕길을 걷는다. 월암근린공원 둘레로 성곽길이 이어진다. 주택 담장으로 사용되었던 옛 성곽을 복원한 것이다. 성곽 위쪽으로는 1933년 경성 측우소로 기상 업무를 시작한 서울기상관측소가 자리 잡고 있다. 앞마당에 경성측우소가 들어설 때부터 강우량 측정이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된 1999년까지 서울지역의 강우량을 측정해온 우량계실이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단풍나무며 진달래며 계절관측 표준목이 식재되어 있어 지나가는 계절을 달래고 다가올 계절을 반길 수 있더라.      




나의 살던 고향그곳에서 놀던 때가......

월암근린공원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독일 영사관이 있어 자연스럽게 독일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던 동네이다. 공원 끄트머리에 1930년 독일 선교사가 지은 2층 양옥 하나가 남아있다.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이곳에서 6년간 머물며 그의 대표작 가운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때문에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라 불린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이 집은 가파른 경사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지하실을 만드는 등 1930년대 서양인 가옥의 구조와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삐그덕 대는 마룻바닥에도, 세월 먹은 피아노 건반에도,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에도 정겨움이 묻어난다. 그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펼쳐지는 꽃 대궐 고향이 꼭 저 깊숙한 산골마을이란 법은 없지.  

 



고향의 봄을 흥얼거리며 걷다 막다른 골목에서 딜쿠샤를 만났다. 홍난파 가옥과 마찬가지로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이지만 집의 규모며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 이곳은 금광개발업자이자 UPA 통신사의 특파원으로 활동한 알버트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테일러가 1923년부터 일제로부터 추방되던 1942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행복한 마음’, ‘이상향’을 뜻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알버트는 1919년 아들이 태어나던 날 간호사가 침대보 밑에 숨긴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는 외신을 통해 3.1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같은 해에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제암리 사건 또한 기사화했다. 일제에 미운털이 박힌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그는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가족들은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던 것. 그의 아내는 2층 베란다에서 망원경을 통해 경성감옥을 살피며 남편의 모습을 찾곤 했단다. 높다란 빌라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어 이제 더 이상 딜쿠샤에서 옛 경성감옥, 지금의 서대문형문소를 내다볼 수는 없다. 내친김에 딜쿠샤가 위치한 언덕 아래 서대문형무소까지 가본다. 사직터널 가장자리로 난 비탈길을 걸으면 금방이다.      




대한 독립 만세그 아픈 메아리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위풍당당한 독립문을 마주한다. 갑오개혁을 추진했지만 외국 세력의 간섭으로 우리는 자주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독립협회의 주도 하에 파리 개선문을 본떠 완성한 독립문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그 어떤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세운 기념 석조물이다. 문의 정면과 뒷면 현판석 좌우에 태극기를, 그리고 그 사이에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을 새겨 넣었다. 수없이 지나다닌 길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것은 처음이다. 

 

독립문을 가로질러 드디어 서대문형무소 앞이다.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그곳이다. 1908년 일제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든 감옥으로 해방 후에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 붉은 벽돌 건물의 옥사와 보안과 청사, 나병사, 사형장 등 일제 때의 건물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외면하고플 만큼 힘겨웠던 옛 시간을 목도하게 된다. 김구, 한용운, 안창호 그리고 유관순까지 ‘대한 독립 만세’ 그 아픈 메아리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멀찍이에서 통곡의 미루나무를 바라본다. 사형장이 건립되던 1923년 사형장 앞에 심은 미루나무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애국지사들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 이 나무를 붙잡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선뜻 다가가질 못하겠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돌아선다. 억압과 공포의 상징인 이 감옥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꿈꾸며 희생당한 이들의 그 한과 넋을 다 어찌할 수 있을까. 나라 전체가 거대한 감옥이었던 시절이기에 아프고 서럽지 않은 땅이 어디 있을까 만은 서울 도심 뒷골목에서 마주한 그때의 흔적에는 더 짙은 애수가 섞여 있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5년 1월호 '서울 교남동'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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