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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Dec 21. 2016

진해 중앙동 원도심

꽃비에 감추어진 진해의 민낯

분홍빛 탐스런 벚꽃나무가 꽃비 나리는 봄날이면 한걸음 앞으로 발을 내딛기 힘들 만큼 인산인해를 이룬다지만 마른 이파리들이 길가를 어지럽히기 시작한 초겨울의 진해는 참으로 차분했다. 그래서일까, 진해 원도심 중앙동 일대를 거닐며 벚꽃만이 떠오르던 그곳에서 의외의 표정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지난 100여 년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아주 오래된 풍경이었다. 글 서진영(자유기고가), 사진 임승수(사진가)

  


조선시대까지 ‘웅천’이라는 이름을 썼던 경상남도 남해안의 이 고을에 1910년 해군기지와 더불어 군항도시를 건설하려 했던 일제는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새 이름을 붙였다. 제압할 진鎭, 바다 해海 자를 써서 바다를 제압하는 기지基地 ‘진해’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이다. 높다란 산봉우리가 고을을 감싸고 남쪽으로 바다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따사로운 고을은 본의 아니게 용감무쌍한 도시로 탈바꿈해야만 했다. 그리고 웅천현 서쪽의 넓고 기름진 벌판이었던 중평 한들, 지금의 진해 중앙동 일대는 새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여덟 갈래 로터리를 에워싼 굴레 

중원로터리 한가운데 섰다. 본래 벌판 한가운데 아름드리 팽나무가 있었던 자리다. 중평 한들의 농사꾼들은 그 팽나무 그들에서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곤 했다는데 일제가 ‘진해군항 대시가계획도’를 설계한 1912년 이후로는 더 이상 걸음 할 수 없었다. 팽나무를 가운데 두고 사방에 여덟 갈래의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일제의 욱일기가 떠오르는 모양새의 원형 교차로가 된 것이다.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 가늠하기 힘들 만큼 노거목이었던 팽나무는 머지않아 고사했다는데 저 홀로 고립되어버린 끝의 외로움이라면 너무 감상적인 것일까. 이전에 살 비비던 조선인들이 모두 쫓겨나고 읍내는 일본인들만이 살 수 있었으니 꼭 틀린 말도 아니리니. 이후 느티나무도 심어보고, 분수대와 시계탑도 놓아보았지만 그 옛날의 팽나무를 대신할 수는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은 둥그런 잔디광장으로 남았다. 팽나무 시절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위로라면 위로랄까.

 

아무것도 없는 로터리지만 아늑한 기운이 좋아 자박자박 걸어보는데 로터리의 한 갈래 끝에 우뚝 솟은 제황산 꼭대기 새 하얀 탑이 눈에 띈다. 모노레일을 타고 오른 해발 90m 제황산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해탑이다. 1967년 해군 군함 마스트를 본떠 만들었다. 진해탑 이전에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1929년에 세운 전승기념탑이다. 1927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우리나라를 독점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며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명당자리로 여겨지던 제황산 머리를 깎아 전승기념탑을 세우고 준공식 때에는 만국기 아래 스모 경기를 펼쳤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전승기념탑이 철거되고, 1967년 우리 해군의 위용을 상징하는 지금의 진해탑이 등장하게 되었다. 전망대에 서서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방사형 원도심과 진해 앞바다를 한눈에 담아본다. 이 양지바른 땅도 질곡의 역사는 피하지 못했었구나. 아무 일 없었던 듯 평화로운 오늘의 일상은 새삼스레 고마운 일이다.      




그들이 살았던 세상 그 후에 남겨진 것들

중원로터리에서 뻗어나가는 여덟 갈래의 길 사이사이로 100여 년 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건축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12년에 준공된 러시아풍의 진해우체국이 대표적이다. 정면 입구에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워 다부진 인상이지만 건물 자체는 목조 마루틀 위해 널마루를 깔았던 목조 건축물이다. 건물 벽면을 둘러싸고 길쭉하게 낸 창문은 물론이고 지붕 아래 반원형의 채광창까지 창이 꽤 많다. 뒤편의 새 청사에서 우편 업무를 하고 있어 옛 우체국은 잠긴 채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지만 얼마나 볕이 잘 들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우체국을 따라 남원로터리로 방향을 따라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은 장옥이 줄을 짓고 있다. 일본어로 ‘나가야’라 하는 장옥長屋은 일종의 연립 주택이다. 여러 채의 집이 담이 아니라  벽을 사이에 두고 길 따라 길게 이어진 구조이다. 이 장옥거리의 장옥은 모두 2층 건물로 1층은 상점, 2층은 주택으로 사용한 일제강점기 판 주상복합과도 같다. 고층의 브랜드 아파트를 마주 보고 이토록 결 다른 풍경이라니. 장옥거리 뒤로 1912년에 지은 일본식 건물 또한 인상적이다. 곰탕집 간판을 단 이곳은 진해 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이었다. 주인도 바뀌고 시절도 달라졌지만 나무 복도로 이어진 내부와 널찍한 정원까지 집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로터리를 사이에 두고 우체국 맞은편 갈림길에 ‘진해 군항마을 역사관’이 진해 중앙동 원도심의 곡절 많은 날들을 소상히 들려준다. 후덕한 관장님으로부터 갈림길 구석구석에 자리한 옛 흔적을 족집게 과외를 받는 듯이 알아낼 수 있었으니 내친김에 발품을 더 팔아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역사관 뒷길에 있는 ‘흑백’의 문을 열어젖혔다. 설마 했는데 창밖으로 흘러나온 피아노 선율은 라이브 연주였다. 인기척을 느낀 연주자가 손가락을 멈추고 손님맞이를 한다. 건물 자체도 진해우체국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이지만 흑백은 1952년에 문을 연 고전 음악다방 ‘칼멘’을 유택렬 화백이 인수하여 1955년부터 줄곧 지역의 문화사랑방으로 맥을 이어왔다. 다방은 폐업 신고를 하여 법대로라면 간판을 내걸 수 없지만 흑백의 퇴장은 영 서운한 것이었나 보다. 여러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영업은 하지 않지만 다행히 흑백의 간판을 내걸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더 이상 다방으로 영업하지 않지만 유택렬 화백의 둘째 딸 피아니스트 유경아 씨가 시민문화공간으로 꾸려나가고 있다. 첫 만남이지만 멀리서 온 손님이라 더 반갑다며 모카커피 한 잔과 지난 흑백의 이야기를 자분자분 들려주는 인심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를 모티브로 했다는 흑백의 이름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그리 너르지 않은 동네지만 골목골목 기웃거렸더니 시장이 반찬이 되려 했다. 제법 오랜동안 문을 열 어둠 직한 중국 요릿집 원해루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6.25 전쟁 당시 UN군 포로가 된 중공군 출신의 화교가 1956년에 개업한 곳이라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타이완의 장제스 총통이 회담 후에 식사를 했던 곳으로, 또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2>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개업할 때 영해루라 내건 상호가 원해루로 바뀌었고 주인도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뀌었지만 옛 정취와 손맛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면 위에 계란 프라이와 채 썬 오이가 얹어 나온 간짜장 한 그릇은 짠맛없이 구수했다. 진해에서 군 생활을 한 해군 생도들에게는 특히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라 했다. 배도 부르고 추억도 풍성하다. 


원해루 맞은편 수양회관 건물이 이고 있는 누각 또한 범상치 않은데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요정이었다고 한다. 군항이었던 만큼 젊은 남성들이 많았고 그 영향으로 요정과 기생집이 더러 있었는데 그중 하나였다고. 당시 뾰족집이라고도 하고 팔각정이라고도 했는데 실제 누각은 육각이다. 누각에서 거리를 내다보는 어여쁜 여인네와 하염없이 또는 힐끔힐끔 어찌 되었던 그 누각에 시선을 빼앗겼을 남정네들의 모습이 이곳의 일상 풍경 아니었을까. 

 

떠나는 자의 마지막 발걸음은 1926년 마산과 진해를 연결하는 진해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연 진해역에서 멈춘다. 일제강점기의 곡절을 지나 1961년에 해병대 전용선이, 1966년에는 진해화학 전용선이 개통되면서 한 때는 어마어마한 물량의 객차와 화물열차가 오갔지만 지금은 하루에 채 열 편이 되지 않는 무궁화호만이 드나드는 간이역에 불과. 그럼에도 여느 KTX 정차역 못지않게 많은 선로가 그 자리 그대로 남아있으니 옛 영광의 빈자리가 더 크게 다가온다. 떠날 사람, 떠나야만 할 사람 모두 떠나고 남은 자리, 그리고 남겨진 것들. 덧없이 흐르는 것이 세월이라지만 그 속에 아픈 날도, 좋은 날도 있었으니 오늘 이리 할 이야기가 많았나 보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12월호 '진해 중앙동 원도심'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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