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동화,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W. 휴 미실다인의 ‘몸에 밴 어린시절’이라는 책은 이렇게 서문을 연다.
‘어디선가, 언제인가 당신은 어린이였다.
이 점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우리 삶에서 간과되곤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른이 된 우리 안에는 욕망을 갈구했던 그 어린아이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이른바 ‘내적과거아(inner child of the past)’. 이 아이는 잊혀지거나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매순간 내 안에 존재하다가 불쑥 튀어나와 어른이 된 ‘나’와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 나도 모르게 역정을 내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일 때가 바로 내 안의 어린아이를 우리가 마주할 때다.
‘내 안에 너 있다’는 로맨틱한 드라마 대사만큼이나 ‘내 안의 어린아이’는 실로 중요한 존재다. 대개 이 존재는 철이 없거나 다소 뒤틀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과거 어느 순간에 충족되지 못한 감정들을 뜬금없이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 역할을 하며 내 안의 뒤엉킨 복잡한 마음들을 하나씩 파악하고, 마주하고, 이해하면서 소위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는 하루 아침에 어른이 된 것 같지만, 이 ‘어린아이’ 덕에 ‘서서히’ 어른이 되어왔다. 다만, 그 어린아이의 등장을 쉽게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은사님이 새로이 번역하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어른이 된 지금 다시 꺼내 읽으며,
이 이야기가 여태 인지하지 못하던 저 가슴 심연에, 이제는 아주 좁은 땅만 밟고 살아가는, 언제 사라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내 안의 어린아이’에 관한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어린왕자’의 서문에서도 생텍쥐페리가 친구 레옹 베르트를 언급하며 ‘어린아이였던 레옹 베르트에게’라고 헌사를 고쳐쓴 것만 봐도 작가 역시 ‘통제되지 않지만 얻을 게 분명 있는’ 어린아이에 주목했던 것 같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제목도 ‘어린’ 왕자다.
-물론 원제는 ‘Le Petit Prince/A little Prince’. 해석하기에 따라 (나이 많지만) 키가 작은(little) 왕자일 수도 있겠지만, 처음 번역될 당시 이러한 작가의 의중을 투영한 제목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어린왕자’라는 제목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물론 ‘어린아이’에 주목한다고 해서 이 동화가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찾아간다는 뻔한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단정짓기에는 생텍쥐페리의 수많은 상징과 우화들이 향하는 <인생의 통찰>이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느낌이다. 이 동화를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가정하고, “나는 사람들이 내 책을 대충 읽는 걸 바라지 않는다”(24p)는 그의 고백을 염두한다면, 마흔을 넘겨 생텍쥐페리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명 ‘엄청난’ 인생의 발견일 것임에 틀림없다. 과연 그 발견이란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현대사회에서 ‘타인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 더 좁혀 <‘나’와 ‘나’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좁혀보면 어떨까. 쉽게 말해, 이 동화에서 ‘나’로 일컬어지는 화자 ‘조종사(나)’와 그의 입을 통해 묘사되는 ‘어린왕자’를 결국엔 동일 인물이라고 읽어보는 것이다. -제목 때문인지 ‘어린왕자’가 이 동화의 주요 화자일 것 같지만, 엄연히 화자는 ‘어린왕자’가 아닌 ‘조종사’라는 사실.
‘어린왕자’는 앞서 미실다인의 말처럼 내 마음 속에서 잊혀질 정도로 희미해진 ‘내적과거아/내적자아’이며, ‘나(조종사)’는 어린왕자를 품고 있는 지구 상에 ‘실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동화는 때때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내적과거아(어린왕자)가 ‘나’(조종사)라는 인물 안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수많은 자아(별)들을 만나고, ‘나’(조종사)의 외적 세계(지구)를 체험하면서 종국에는 본인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종의 <나에 대한 해설서>가 된다. 이 두 존재가 서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때로는 언쟁을 벌이며 궁극적으론 인생의 참맛을 깨닫는다는 이야기.
실제 나(조종사)는 어린시절 어른들에 의해 좌절을 맛 본 존재다. ‘어른들’ 앞에서 생각의 나래를 펼치며 자랑스럽게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을 그려 보여주지만, 어른들은 보아뱀 대신 눈에 보이는대로 ‘모자’로 그림을 읽을 뿐이다. 이를 두고 그 당시의 ‘나’(조종사)는 상실이 꽤 컸던 듯 하다. 그림 1호와 제2호를 ‘실패’로 규정짓고 아예 그림그리기를 포기하며 다시는 그림을 그릴 엄두를 내지 않았다. 대신 어른들 곁에 머물며 ‘자신의 일이 제일 중요한’ 조종사가 됐다. 동시에 실패를 경험한 그 당시 ‘조종사의 어린 자아’는 마음 속 깊은 어딘가로 숨어 들어갔다. 사라지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런 성체(成體)로서의 조종사 앞에 까마득히 잊고 있던 어린 내적 자아가 불쑥 나타난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그 ‘작은 아이’는 첫만남부터 그림을 그려달라 조른다. 그간 억눌러왔던 그림에 대한 욕구를 갈망하기라도 하는 듯 조종사의 물음에는 제대로 답하지도 않고 끝도 없이 질문만 늘어놓는, 그야말로 막무가내다. 비행기에서 떨어졌다는 조종사의 말에는 ‘깔깔’거리는 등 ‘어린왕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종사 앞에 나타났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 ‘작은 아이’는 그림 1호, 2호를 끝으로 절필한 조종사로부터 작화를 이끌어낸다. 그러고는 ‘코끼리 삼킨 보아뱀’의 존재를 대번에 알아보는 등 어린왕자는 조종사의 마음을 빼앗는다. 조종사는 어린왕자를 두고 ‘내 어린 심판관’, ‘멋진 왕자님’, ‘내 친구’라는 호칭을 붙여가며 호감을 갖게 되고, 나아가 “그 아이는 아마도 내가 자기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25p)며 동일시의 감정을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작아”라는 어린왕자의 말처럼 내적과거아 ‘어린왕자’는 조종사의 마음 속 심연에 작은 심리적 공간만을 겨우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미약한 존재가 불쑥 조종사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한 때 잊었던, 하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은 채 나의 몸에 밴 어린시절의 역사가 나를 찾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테다. 그 어린왕자는 때때로 제법 어른스러운 인생 철학으로 조종사가 ‘진짜 어른’으로 나아가는 내적 성장에 시동을 걸어주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