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abre Jun 16. 2019

샌프란시스코에 언니가 산다 #2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LIFE

6. 첫 등교를 했다. 우리 반에는 내가 여기서 제일 어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20년 사신 분도 계시고 2년, 10년.. 아무튼 이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반은 이 곳 ESL 클래스 중에 가장 높은 반이다. 영어를 못해서 모인 게 아니라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수능영어빨로 만점 받고 들어온 나에게는 사실 수준 이상이다. 그런 곳에 있어야 영어가 금방 는다는 미국인턴 출신 친구의 말만 믿고 그냥 다 알아듣는 척 앉아있다.


7. 학생들은 정말 적극적이다. 너도나도 이야기하려고 수업 내내 끼어드는 모습이 신기하다. 나도 학교 다닐 때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었지만 선생님이 “자, 질문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타이밍만 기다렸을 뿐이다. 교실에는 아시아, 남미, 유럽 전 세계의 사람들이 있는데 정확히 한국인과 일본인을 제외하고는 ‘나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의견을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부럽고, 그중에 반은 헛소리기 때문에 마냥 좋지는 않다. 이 곳 선생님들도 고생이 많으시겠구나 싶다.


8. 자기소개의 시간은 미국에서도 피해 갈 수 없다. 메인 질문은 “What do you do?”다. 학생부터 주차요원, 종업원, 요리 연구가, 기계공, 은퇴하신 분까지 다양한 분들이 계신다. 적극적인 학생들 덕분에 질문은 계속 핑퐁처럼 이어지고 나같이 낯가림하는 사람은 단답형으로 대답하지만 다들 자기 얘기하는 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TMI가 넘쳐난다.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무슨 식당이냐, 어디에 있냐, 거기에 뭐가 있지 않냐, 나도 곧 가겠다며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나는 대충 프리랜스 디자이너라고 둘러댔는데 이 곳이 샌프란시스코인 덕분에 여기는 그런 사람이 많고 시대가 점점 변하고 있다는 주제로 번지면서 내 얘기는 금방 끝낼 수 있었다.


9. 식상한 질문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였으면 이렇게 직업 얘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적지 않은 나이에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결혼은 했는지, 했으면 애는 있는지 질문이 더 일반적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 곳에서 그 질문들은 불법 취급을 받는 수준의 금기어다. 나이도 마찬가지다. 당사자가 먼저 말한 경우라면 그에 대한 추가 질문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전까지는 엄청난 실례가 되는 질문이다. 여러 문화권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실의 특성상 선생님은 이것에 대한 이유를 굳이 설명해주셨는데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 나이는 사회생활에 편견을 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질문 자체가 차별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곳은 과연 샌프란시스코구나!


10. 대마초 하나 때문에 온 나라가 유별나게 들썩이는 한국에 살고 있지만 유럽에서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고 특히 암스테르담을 좋아해서 3번을 다녀왔기 때문에 대마초는 나에게 낯설거나 거부감 드는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교실에서 대마초 냄새가 나는 건 참기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린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교실에서 대마초 냄새라니! 이 곳은 과연 샌프란시스코구나! 아이고 머리야!


11. 한국에서 배우는 영어는 확실히 미국영어다. 리스닝이 잘된다. 못 알아듣는 경우는 단어 뜻을 몰라서지 심지어 그 단어도 들리긴 들린다. 아일랜드에 있을 때 브런치카페에서 일을 시작하고 겪은 멘붕에 비하면 지금은 파주 영어마을에 와있는 것처럼 리스닝이 잘 된다. 아이리쉬들이 “너는 영국영어가 아니라 미국영어를 쓰는구나? 하지만 괜찮아 우리는 영국도 싫어해”라고 했을 때 아이리쉬 영어는 영국식도 미국식도 아니라는 것과 내가 쓰는 영어는 미국영어임을 알았는데 아이리쉬 영어는 떠나는 순간까지 제대로 캐치하지 못한 반면 이 곳에서의 영어는 훨씬 편하다. 나는 ‘홋워터’보다는 ‘핫워럴’이 좋다.


12. 조금 벗어난 얘기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 나라였지만 긴 역사 동안 식민지에 가까운 통치를 받으며 세 차례 대기근을 겪고 반영 감정이 커졌다고 한다. 우리가 ‘아일랜드’라고 부르는 남아일랜드는 독립된 국가지만 북아일랜드의 주권은 여전히 영국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아일랜드는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 그리고 아이리쉬어까지 섞여있고 중국의 성조처럼 말에 높낮이가 있는 그들만의 영어를 사용한다. 아일랜드에 워킹홀리데이를 지원하면서도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그곳에 있는 내내 고개는 잘 끄덕이지만 말수가 없는 조용한 한국 여자아이 컨셉으로 지내야만 했다. 이 곳에서는 일단 문장이 들린다는 것이 희망적이다. 이왕 운 좋게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좀 나대서 영어실력이나 키워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샌프란시스코에 언니가 산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