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나도 디자이너
프랑스의 300년된 제지사 아조위긴스와 국내 제지업체 삼원페이퍼에서 함께 주최한 흥미로운 팝업전시에 다녀와서 기분이 좋은 김에 내가 아는 얄팍한 지식을 정리해보았다.
인쇄는 크게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나뉜다. 아날로그에는 옵셋, 마스터 등 여러가지 방식이 있지만 전문가가 아니라면 아날로그에서는 옵셋만 알면 된다. 그럼 옵셋과 디지털로 나뉜다.
옵셋은 판이 필요하고 디지털은 파일만 있으면 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발생한다. 우리같은 쩌리들이 인쇄할때는 빠르고 저렴한 디지털이 훨씬 좋다. 대신 엄청나게 많은 양을 인쇄할 경우(이마트 전단지 같은 진짜 대량) 옵셋인쇄가 오히려 더 시간이 절감되고 비용도 절반 이상 급감한다.
옵셋이 디지털에 비해 조금 더 풍부한 색상을 구현할 수 있긴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면 큰 차이를 느낄 수 없고 오히려 디지털은 한번 감리를 보면 계속 같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 잉크를 많이 사용해서 색을 진하게 하는 건 옵셋과 디지털 모두 가능하다.
인디고 인쇄라는 용어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인디고는 디지털 인쇄장비 중 hp사에서 나온 장비 이름이다. 디지털 장비 중에는 hp의 인디고와 후지의 제록스가 양대산맥이다. 인디고 인쇄 = 디지털 인쇄 이지만 굳이 인디고를 따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업체에서 좋은 장비를 쓰는걸 생색내기 위함이다.
용지 자체나 후가공의 세계는 더욱 더 무궁무진하다. 해외에서는 인쇄해본적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국내에서도 디자인의 범위를 풍부하게 해주는 수많은 용지와 기술이 있다. 성원애드피아 같은 경우는 소규모에 최적화된 서비스와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쉽게 용지나 후가공을 선택해서 출력을 할 수 있다. 카더라에 의하면 국내 인쇄의 60%가 성원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심지어 을지로 인쇄소 사장님도 명함같은 자잘한 건은 성원에 맡겨서 받는다고 했다. 성원이 친절하진 않지만 가성비나 대중성은 국내 탑이라고 생각한다.
매년 달력을 제작하고 있는 24와2분의1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어쩌다보니 전공도 아닌 디자인에 발을 들였고, 각종 광고홍보물을 만들었던 전 직장을 거쳐 이제 편집디자인은 나의 업이 되었다. 동시에 더 나은 인쇄물을 얻기 위해 계속 검색해보고 전문가에게 물어보고 전시도 챙겨보고 인쇄공장도 가급적 방문해서 과정을 지켜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쇄의 세계까지 발을 들이게 됐다. 요즘은 아예 이쪽으로 직업을 가져보고 싶기도 하다. 영국에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디자이너라고 일컫는 '이미지 디자이너'와 함께 '피지컬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있다. 피지컬 디자이너는 이미지 디자이너가 만든 디자인을 어떤 소재나 원단에 하면 좋을지 결정하고 고객에게 제안하는 일을 한다. 용지와 후가공 기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어떤 종이가 어떤 장비에 호환되는지까지의 지식이 필요하다. 유럽의 인쇄비용이 비싼 이유는 이러한 디자이너들의 가치를 높게 치고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피지컬 디자이너’라니 이름부터 정말 멋진 직업이다.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부딪혀서 얻는 인쇄지식 말고 저런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애초에 인쇄는 그저 공장에 계신 기장님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국내시장에서 이런 직업은 인정받기 어려우려나. 당장 2018년 달력 인쇄가 코 앞인데 이번에는 또 누구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귀찮게 하며 이것저것 물어보게 될까. 이렇게 어쩌다보니 인쇄도 나의 업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