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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석 Jun 14. 2016

황금 파도
11화

최민석




많은 사람을 짧은 기간 동안 속이는 건 가능하다

몇몇 사람을 오랜 기간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오랜 기간 속일 수는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




#11



기혁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서 종이를 들었다. 그 종이 위에는 마치 소설책에서 오려 붙인 듯한 몇 줄의 문장이 있었다. 어디서 오려 붙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기혁에게 보내는 전갈이라는 듯 의도대로 차례차례 붙어 있었다. 


넌 잘못 생각하고 있어.

약속한 것을 못 지킬 수도 있다고. 

자, 그만. 이젠 그만.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중안일보의 불공정한 보도. 그리고 중안일보에 끼워져 있는 이 오려 붙인 문장. 기혁은 이것이 자신에게 보낸 경고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이 날 것 같았지만, 가물가물하기만 할 뿐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나 싶어 한 문장 씩 스마트폰에 입력을 해 구글에서 검색을 해보았다. 첫째 줄, 둘째 줄, 셋째 줄, 모두 허탕이었다. 그러다 마지막 줄을 검색하자 몇몇 서평 사이트가 검색돼 나왔다. 기혁은 숨을 죽이며 흥분한 채로 클릭을 했다. 


맞다앵무새 죽이기!


기혁은 서평가의 홈페이지를 보며 그것이 대학시절에 읽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에 나오는 대사라는 걸 알아챘다. 


흥분을 한 기혁은 신문지를 움켜쥔 채 비서실로 가, 보좌관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 신문 누가 갖다 줬어요?


평소와는 다른 태도에 보좌관 현욱은 어리둥절해하며 대답했다. 


그냥 배달 온 겁니다매일 아침마다 와요


기혁은 현욱의 대답에 ‘고맙다’는 대답조차 않고, 쪽지를 들고 의원실에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곧장 옆 건물인 국회 후생관 1층으로 뛰어 들어갔다. 파리채로 책장을 탁 탁 치고 있던 늙은 서점 주인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혹시 어제나 오늘 <앵무새 죽이기사간 사람 없습니까?


오랜 세월 국회 서점을 지켜온 노인은 한눈에 기혁의 재킷 왼쪽 라펠에 매달린 ‘국회’ 배지를 봤다. 노인은 ‘버릇없는 초선의원이군’ 하고 여겼지만, 내색하지 않고 매대에 놓인 모니터 앞에서 입으로 한 음절씩 “앵. 무. 새. 죽. 이. 기” 라고 소리 내며 한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톡 톡 치며 검색을 했다. 그러고선 거의 코끝에 걸친 안경 렌즈 위로 기혁을 보며 말했다. 


이거 반품해야겠어요작년부터 한 권도 안 팔렸습니다


젠장


자신도 모르게 기혁의 입에서 분개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혁은 곧장 서점 문을 나서며 이번엔 국회 도서관을 향해 달려가려다 잠깐 뒤돌아서 외쳤다. 


고맙습니다!


노인은 기혁이 가버리자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싸가지는 있군


그래도 왜 국회의원이 아침부터 이렇게 뛰어다니는지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국회 서점 생활 20년에, 이렇게 뛰어다니는 의원을 본 건 처음이었다. 



기혁은 후생관을 나와, 차도를 달리고, 정원을 가로질러, 국회 도서관에 도착했다. 국회 도서관으로 달려가 입구에 신분증을 보여준 뒤, 곧장 1층 대출대로 뛰어갔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직원에게 물었다. 


- <앵무새 죽이기빌려 간 사람 있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직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기혁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민중당 장기혁 의원입니다꼭 알아봐야 할 일이 있어서요부탁합니다


그러자 30대 여직원은 공무원 다운 의례적인 말로 절차를 시작했다. 


원래는 안 되는 거 아시죠이것도 다 개인정보거든요


그러나 이미 손가락은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대출됐네요


누굽니까누가 빌려 갔습니까


기혁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렇지만, 여직원은 안경을 고쳐 쓰며 과연 알려줘도 되는지 또 한 번 고민하는 듯 잠시 시간을 가졌다. 그러더니, 기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맥주 맛있게 만들어주세요지긋지긋합니다


기혁은 마침내 작은 여유를 찾으며 웃음으로 답했다. 


물론이죠약속합니다


사서는 작은 목소리로 기혁에게 말했다. 


외우실 수 있죠?


당연합니다어서요어서


사서는 기혁의 눈을 보며 공범자처럼 작지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김지원입니다의원회관 306호실


기혁의 얼굴이 더욱 흥분하며 달아올랐다. 기혁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달려가다, 이번에는 뒤돌아서 다른 인사를 했다. 


몇 달이면 됩니다맛있는 맥주


그리고 국회 도서관 앞에 나오자마자 보좌관 현욱에게 전화를 했다. 


의원회관 306호실이 누구 방입니까?


현욱이 ‘306호라…’ 하며 혼잣말을 하며, 의원실 현황표를 보는 듯했다.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찾던 현욱이 마침내 답했다. 


윤승민 의원실입니다


기혁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윤승민 의원이라니! 전 한국당 대표를 하다가, 대통령에게 항명했다는 이유로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해, 급기야 무소속으로 당선된 떠오르는 신흥 거물 윤승민. 총선 후 여권 내 지지도 1위로 급부상한 윤승민 의원. 도대체 그는 이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기혁은 이날 밤, 불이 꺼진 자신의 방에서 맥주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했다. 


윤승민의 보좌관이 <앵무새 죽이기>를 대출해간 건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연의 일치일까그러기엔 대출해간 날짜가 시기상으로 너무 맞아떨어진다그리고 이 쪽지를 보낼 사람이라면 내가 주세법을 발의하자마자, <앵무새 죽이기>에 이런 대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낼 정도의 애서가다진보에 유정민이 있다면보수엔 윤승민이 있다고 할 만큼윤승민은 두뇌회전이 빠르고그 모든 지식의 원천은 풍부한 독서량에서 기인한다그렇다면만약 그 쪽지가 윤승민으로부터 온 것이라면그는 왜 나한테 그런 쪽지를 보낸 것일까복당을 반대하는 당에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그는 언제나 인터뷰에서 한국당이야 말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자깊은 애정을 간직한 곳이라고 수차례 밝혀왔다그게 아니라면혹시 정민이 말한 것처럼 주세법이 건드리면 안 되는 큰 거라서그래서그걸 건드린 나를 견제하고당을 지켜내려는 것일까그러기엔 나는 아직 너무나 별 볼일 없는 풋내기 아닌가.’


기혁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이제 더 이상 사건이 커지는 건 골치 아프다. 주세법도 우연찮게 내뱉은 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리다니. 기혁은 그야말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하지만, 묘한 것은 맥주를 한 모금씩 넘기며 생각을 하나둘씩 정리할수록,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씨 같은 게 하나씩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그 불씨가 가슴 안에서 서서히 올라올 즈음, 기혁은 남은 기네스를 입안에 전부 털어 넣었다. 그리고, 기혁은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혼자서 읊조렸다. 


그래까짓것 한 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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