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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석 Jun 07. 2016

황금 파도
10화

최민석




책은 고통을 주지만 맥주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영원한 것은 맥주뿐!”

괴테(1749-1832)




#10    



버려진 공장을 개조한 곳 아니랄까 봐, 노이쾰른의 벽에는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돼 있다. 군데군데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흔적도 있다. 창 안으로는 감은 기혁의 눈꺼풀을 데울 만큼 온기 가득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고, 이곳에서 기혁은 의자 등받이에서 엉덩이를 뺀 채 기대앉아 있다. 한 손에는 병맥주를 쥐고, 잔에 따르지도 않고 홀짝거렸다. 오늘은 수제 맥주가 아닌, 병맥주다. 발라스트 포인트 스컬핀(Ballast Point Sculpin). 스컬핀의 쌉쌀한 맛이 평일 오후 세시의 여유와 어우러져 안온감에 젖게 했다.   


실내에는 미국의 원맨밴드 ‘아이언 앤 와인(Iron & Wine)’이 작년에 발표한 ‘This must be the place’가 풍성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기혁은 곡명처럼 ‘그래, 바로 여기야!’라고 속으로 감탄했다. 평일 오후 세시의 맥주라니. 영국의 대장장이처럼 턱수염을 길게 기른 ‘아이언 앤 와인’의 샘빔은 한눈에 봐도 술꾼처럼 생겼다. 앨범 재킷에도 턱수염이 긴 자신의 얼굴과, 두 남자의 손이 병맥주를 꼭 쥔 채 건배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탓에 술맛이 더욱 난다. 한낮의 햇살을 즐기며 마시는 IPA 맥주라니.   


게다가, 드디어 국회의원으로서 첫 법안을 발의했다. 어제 법안 접수를 했으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업계 조사를 한다는 핑계로 쉴 참이었다.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이제 국산 맥주도 맛이 좋아질 거란 상상에 흐뭇해졌다. 그 상상에 취해 있는 가운데, 휴대 전화기가 다급하게 울렸다. 액정을 보니 처음 보는 번호였다.  

 

장 의원  


접니다만누구신지  


자네는 당 대표 번호도 모르는가.  


아니, 김석인이 무슨 일로 한낱 초선에 불과한 기혁에게 직접 전화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개인 휴대전화로 말이다.  


자네그거 꼭 해야 하나?  


그거라니요?  


그러자 석인은 다소 몰아붙이는 어투로 되물었다.   


왜 이래한 게 뭐 있다고딱 하나 아닌가?  


그제야 기혁은 석인이 말하는 바를 알아챘다.   


법안 말씀이신가요?  


그래주세법 말이야  


아니그건 어제 오후에 발의했는데어떻게 아시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정말 꼭 해야 해  


기혁은 느닷없는 전화에 혼란스러웠다. 당 대표가 갑작스레 개인 휴대 전화로 전화를 해서 ‘꼭 해야 하느냐’니. 기혁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스컬핀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호흡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꼭 할 겁니다  


그러자 수화기 건너에서 잠시 다소 격정적인 어투가 들려왔다.   


자네가 정치를 뭘 알아정치가 장난이야?!  


침묵이 흐른 뒤,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었나너는 배우야배우!  


기혁은 잠자코 대표의 말을 들었다.   


가만히 있다가 시키는 일이나 하란 말이야  


이 말에 곧장 기혁이 응수했다.   


하지만 약속을 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코웃음이 들려왔다.   


죽어도 해야겠다이건가?  


기혁은 당 대표의 공격적인 말을 듣자,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반골기질이 동했다.   


약속은 잘 하지 않지만한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수화기에서 또 웃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실소 같기도 하고, 조소 같기도 하고, 두려움을 감추려는 위장 웃음 같기도 했다. 웃음이 그친 뒤, 석인은 갑자기 다짜고짜 반말로 물었다.   


너 뭐하는 자식이야?!  


기혁이 윽박지르는 석인에게 답했다. 

  

저는 단지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저, 단 한 잔의 훌륭한 맥주를 바랐던 35세의 남자, 기혁은 전화를 끊은 후 멍한 채로 노이쾰른에 앉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맞은편에 있는 바의 맥주 탭들이었다. 나란히 줄지어 선 은색 탭들이 마침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장이 따르는 잔에서 맥주가 와동하고, 흰 거품이 파도처럼 올라왔다.

황금 바다에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    



불과 열흘 만에 나온 주세법’ 

초선의원의 열정인가, 고집인가  


민중당의 장기혁 의원(35)이 생방송으로 진행된 중앙 방송의 TV 토론회에서 “주세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선언한 지 불과 열흘 만에 개정안을 제출했다. 국회 의안과에 따르면, 지난 15일 장기혁 외 9인이 발의한 ‘주세법 개정안’이 접수됐다. 이 법안은 그간 팽배해온 ‘국산 맥주는 맛이 없다’는 소비자의 인식을 전환하고,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발의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너무 짧은 시일에 개정안이 제출돼 졸속 법안이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익명의 국회 관계자는 “법안의 현실성이 부족하며, 한국적 상황에 맞지 않다”며 “통과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것은 바로 개정안의 핵심인 맥주 주조에 필요한 맥아 비율 때문이다. 현행법상 맥주에 들어가야 할 맥아는 10% 이상인데, 장기혁 의원이 제출한 개정안은 70%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설비 전환 비용으로 인한 경영 악화와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 발생이 막대하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다. 정치권 역시 같은 입장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그간 부과된 맥주의 주세율을 72%에서 30%로 줄여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정부 입장에서는 세수 확보가 되지 않아 국정 운영이 어렵다는 게 이유다. 주세법 개정안이 국산 맥주의 품질 개선과 소비자 만족을 얻어낼지, 업계와 정치권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혼란만 야기될지 벌써부터 논란이다. 


김남일 이양중 기자 

kkayasanda@joongan.co.kr   



의원회관 403호 오전 7시 30분. 기혁은 이틀 만에 벌어진 일에 어리둥절했다. 지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중안일보의 부정적인 보도. 이것을 결코 피처 기사라 볼 수 없다. 아직 논란이 일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논란이다’는 자신들의 표현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주요 언론사에서 ‘논란이 될 것’이라고 예상을 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이것을 ‘논란거리로 만들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단순히 맥주 맛을 개선하고 싶었던 기혁은 자신의 법안이 첫 번째 암초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기혁은 설마 싶었던 관계도를 떠올려보았다.   


중안 일보의 대주주는 이성 전자다. 물론, 공식적으로 중안 일보의 회장은 따로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이성전자 회장이 처남이다. 그리고, 이성 전자와 미산 그룹은 사돈지간이다. 미산 그룹, ‘사람이 미래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었던 바로 그 기업이다. 기혁이 한때 몸담았으며, 바로 한강맥주를 만들고 있는 모기업이다. 기혁은 아무리 한국이 얽히고설킨 사회라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색깔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자네가 정치를 뭘 알아


대한민국은 광산 막장 같은 곳이라고!  


기혁은 기사를 읽자마자 당 대표와 정치 9단 유정민의 말이 떠올랐다. 그 뜻의 실체가 조금씩 손에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수록 멍해져 의미 없이 신문을 한 장씩 넘겼다. 머릿속에선 앞으로 주세법을 어떻게 통과시켜야 할지, 과연 중간에 좌초되지나 않을까 하는 고민과 걱정, 두려움,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한 반골기질 특유의 반발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이런 혼란을 느끼며 신문을 한 장, 두 장, 세 장 넘겼다. 어느덧, 마지막 장을 넘길 차례였다.   


바로 그때였다. 신문지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그 종이는 신문을 펼쳐 놓았던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한데, 얼핏 보기에도 전단이 아니었다. 붉은색 종이 위에 어떤 문장들을 하나씩 오려 붙인 것이었다. 네 문장이 차례로 잘라 붙어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의도적으로 신문지 사이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혁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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