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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석 May 31. 2016

황금 파도
9화

최민석






사기가 판을 치는 시절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게 혁명이다

조지 오웰(1903-1950)




#9



삶이란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다. 여기, 평일 정오의 텅 빈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이 남자에게도 그렇다. 신이 내린 벌로 생의 의욕을 척출당해 버렸는지, 남자의 어깨에는 힘이 빠져 있다. 그 탓에 뒷모습은 진회색 양복을 입은 연체동물 같다. 게다가 그 어깨를 감싸고 있는 양복은 역사상 다리미 따위가 존재하기도 했냐는 듯 구겨져 있다. 서류 가방 역시 모서리는 물론, 몸통까지 대기권의 풍파를 제 혼자 맞은 양 피부가 쓸려 있다. 덧붙일 필요 없이 그의 구두 굽 역시 지구 표면을 모두 마찰한 듯 오그라져 있다. 


남자는 오랫동안 자신 앞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뒤에서 본다면 요동 없이 호수만 바라보는 그 모습이 무슨 연유로 벤치에 앉게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무얼 기다리는 건지, 시간을 때우려는 건지, 아니면 휴식이 필요한지 감 잡을 수 없는 모습이다. 얼마 정도 지났을까. 남자는 양복 안주머니에 흰 종이 한 장을 꺼내, 뭔가 쓰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써 내려갔다. 그렇게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호수를 다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자신의 오른쪽 옆에 두었던 베이지색 종이봉투에 손을 넣었다. 남자가 손을 꺼낼 때는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남자는 주먹 쥔 손을 땅바닥을 향해 풀었다. 그러자 비둘기들이 땅에 떨어진 모이를 주워 먹기 시작했다. 남자는 말없이 이 동작을 이십여 분 반복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썼던 편지지를 4단으로 균등하게 접었다. 편지지를 재킷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고선,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 제 몸만 벤치에서 일으켰다. 남자가 떠나자 벤치에는 고요한 적막, 주인에게 버림받은 낡은 가방, 종이봉투, 그리고 비둘기 떼가 남자를 대신했다. 얼마 뒤 남자의 온기가 사라질 즈음, 이번에는 다른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았다. 




                                                                             * 



드디어 한국 맥주도 폭탄주용 재료가 아니게 되었다.” - 티벳의 진돗개


독일에서는 맥주 값을 올리면 국가가 마비돼요그만큼 독일에서는 노동자를 위한 술이죠그간 한국 정부는 노동자에게 소주만 마시라 한 꼴이에요이제 맥주 민주화를 이뤄야 합니다.” - 진준권


정치인 한 명의 실수로도 맥주 맛이 바뀝니다투표의 중요성이죠.” - 주국


뉴턴아르키메데스장기혁의 공통점 딴짓을 하다가 뭔가를 해냈다는 점여러분우리도 딴짓합시다.” - 동교동 만성피로


금주고 수행이고 다 때려치우고나도 이제 한국 맥주 마신다.” - 해밑스님 


기혁이 생방송 토론회에서 ‘주세법을 개정하겠다’고 한 날, 트위터에는 일대 혁명이라 해도 좋을 만큼 효모법에 관한 멘션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간 국산 맥주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이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표현으로 잔뜩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런 멘션들은 모두 1,000회 이상의 리트윗(재인용)을 기록하며, 기혁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 시켰다. 


다음날 언론들도 일제히 기혁의 효모법에 대한 소식을 다뤘다. 


- 초선 의원의 과감한 맥주 혁명 예고 (참겨레)

- 국산 맥주 드디어 맛의 개혁을 시작하나 (서울일보)

- 국산 맥주 어떻게 바뀔까? (KBS 9시 뉴스)


포털 사이트의 메인 뉴스는 장기혁으로 도배되었고, 실시간 검색어 1위도 ‘장기혁’이었다. 이슈 검색어 역시 ‘장기혁 효모법’이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건설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슈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었다. 세상은 마침 그간 모두 맛없는 맥주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듯, 하루 만에 초선 의원 장기혁의 발언을 주목했고, 그의 발언을 무한대로 확대재생산했다. 


그러면 이때 기혁의 심정은 어땠을까. 온 나라가 기혁의 발언에 들끓어 있는 동안, 이슈의 주인공은 의원실에 망연자실한 채로 얼굴을 손에 파묻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지.’ 


자신은 그저, 노이쾰른에서 공짜 맥주나 마시고, 당이 추진하는 일에 찬성표만 던지면 되는 인물이었다. 그게 자신의 역할이다. 어쩌다 정민이 나가야 할 토론 자리에 대타로 앉아, 한국당 김정태의 공격을 받다 보니, 그저 우발적으로 쏟아낸 발언이었다. 기혁은 이제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의원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세상의 반응을 본 기혁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정민의 말이었다. 


정치는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거니까.’ 


앞으로는 자나 깨나 말조심하리라! 그 누가 자극을 한대 해도 절대, 함부로 선언 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 그게 비록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에 관한 것이라도 반드시 팔짱 낀 채 뒤에 빠져 있을 테다! 기혁은 이렇게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나저나, 이번 발언은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잔은 이미 넘어 졌다… 물은 엎질러졌다… 사태 해결을 위해 이런 풍경을 떠올리며, 머리를 굴리려 해보자 누가 장기혁 아니랄까봐 물이 엎질러진 빈 잔에 맥주를 붓고 있는 바텐더의 모습이 떠올랐다. ‘젠장, 안 된단 말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미 상상의 무대는 독일의 조용한 바로 이동한 뒤였다. 천장에 투명한 유리잔이 잔뜩 매달린 고전적인 바에서 바텐더는 독일식 맥주를 따르고 있었다. 효모가 풍부한 독일식 맥주……. 


그러다 기혁은 무릎을 탁 쳤다! 


라인하이츠게보트(Reinheitsgebot)!’ 


맥주 순수령!’ 


그렇다. 중세 독일의 빌헬름 4세가 1516년에 제정한 ‘맥주 순수령’. 맥주의 재료로 ‘보리, 맥아, 홉, 물’만 사용토록 지정해, 현대 맥주의 기초를 확립하고,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지켜지고 있는 ‘맥주 순수령’ 말이다. 


전날 김정태가 몰아붙이는 바람에 부지불식간에 ‘효모법’이란 말을 내뱉었지만, 이는 사실 기혁의 뇌와 가슴속에 언젠가 ‘맥주순수령’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자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기혁이 누구인가. 비록 전략 공천으로 당선된 풋내기 의원이자, 술꾼에 지나지 않지만, 바로 그 점이 그의 장점 아닌가. 맥주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으며, 맥주에 관해서라면 식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 기혁은 마치 자신이 한국의 빌헬름 4세라도 된 듯, 흥분하여 열린 문틈으로 보좌관에게 말했다. 


현욱 씨주세법 좀 출력해서 갖다 줄 수 있어요?


그러자 보좌관 손현욱이 불쑥 열고 들어왔다. 


대한민국 주세법입니다!


별안간 탁자 위에 툭 놓인 종이 뭉치를 보며 기혁이 놀라서 물었다. 


퀵 서비스하셨어요?


보좌관 손현욱이 의욕에 가득 차 말했다. 


어제 토론이 끝난 후부터줄곧 출력해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혁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현욱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는 의대생처럼 말했다. 


금주고 수행이고 다 때려치우고나도 이제 한국 맥주 마신다!


기혁이 어리둥절해하다가, 휴대폰에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니… 그럼?!


현욱이 득의양양하게 답했다. 


접니다해밑 스님!  





그날 기혁과 현욱, 그리고 비서관 2명과 인턴은 주세법을 꼼꼼히 훑어본 후, 몇 가지 사항을 바꾸기로 했다. 

우선, 한국 맥주가 맛이 없는 이유는 대기업이 맥주 시장을 독과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기업 맥주를 없앨 수는 없다. 고로, 대기업에서 만드는 맥주를 맛있게 하도록 해야 한다. 전통적인 맥주 강국 독일, 아시아의 강국 일본, 그리고 수제 맥주의 강국 미국, 이 세 나라의 법을 참고했다. 하지만, 참고만 할 뿐 이들 보다 더 나은 법을 만드는 게 이들의 목표였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 생산국’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지 않았던가. 의원회관 403호, 장기혁 의원실에서 고심해 나온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맥아 비율을 높였다. 일본에서는 맥아량이 66.7%를 넘어야 ‘맥주’로 인정이 된다. 그 이하 비율의 맥주는 ‘발포주’라 부르며 구분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맥아량이 10%만 넘어도 맥주로 인정이 된다(주세법 시행령 3조 4항). 맥아량이 맥주맛을 좌우하는 핵심요소라는 걸 고려할 때, 최소 함량을 높여서 명문화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하여, 기혁은 70%의 맥아 비율을 넘겨야 ‘맥주’라는 단어를 쓸 수 있도록 했다. 그 이하 비율의 맥주는 ‘발포 맥주’라 칭하기로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율뿐 아니라 원료도 철저히 공개해야 한다. 그러면 효모비율을 지켜보는 시선이 늘어난다. 결과적으로, 훌륭한 국산 맥주가 탄생할 기초가 다져진다. 


둘째, 크래프트 비어, 즉 수제 맥주 산업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80년대 미국에서 수제 맥주의 붐이 일어난 것은 바로 ‘홈 브루잉(가정 주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혁은 면허를 허가제가 아닌, 등록제로 변환시키고자 했다. 아울러, 면허 유지를 위해선 국세청과 식약처의 이중 관리를 받아야 했다. 이제껏 똑같은 행정 절차를 두 번 겪어야 했던 것이다. 기혁은 국세청과 식약처의 행정 절차를 일원화 시켰고, 미국의 오하이오 주처럼 주류 면허세를 대폭 인하했다. 궁극적으로는 ‘홈 브루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벨기에처럼 작은 장비만으로도, 카페에서 하우스 맥주를 만들어 팔 수 있다. 아울러, 크래프트 비어를 병맥주, 캔맥주 형태로 마트, 슈퍼마켓,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도록 유통망을 허용했다. 시장 전체로 볼 때 훌륭한 맥주가 더 공급되는 셈이었다. 


셋째, 성인 인증만 하면 맥주도 통신 판매로 살 수 있게 했다. 이미 도수 5%의 막걸리는 통신판매가 허용되지 않았는가. 맥주의 평균 도수는 사실 막걸리보다 더 낮다. 따라서, 굳이 국민 건강 운운하며 막을 구실도 없다. 이렇게 하면, 접근성을 제약받은 크래프트 비어도 통신 판매로 사 마실 수 있다. 병맥주와 캔맥주는 물론, 사업자가 원한다면 생맥주인 케그 맥주도 통신판매로 팔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맥주에 붙는 세금을 대폭 낮추기로 했다. 기혁은 맥주가 노동자들이 맘껏 마실 수 있는 위로의 음료가 되길 바랐다. 이를 위해선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우리나라 주세법은 발효주와 증류주로 나눠서 세금을 걷어 들인다. 증류주는 도수가 높으므로, 국민 건강을 위해 72%의 세금을 매긴다. 발효주는 막걸리에는 5%, 청주, 약주, 과실주(와인 포함) 에는 30%의 주세를 매긴다. 하지만, 발효주에 포함되는 맥주에만 증류주와 똑같은 세율인 72%가 부과된다. 


의아한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주류 시장의 매출액과 이로 인해 거둬들이는 세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주류 시장의 매출 1위는 소주가 아니라, 맥주다. 매출액 약 4조 천 억 원으로 2위인 소주보다 시장규모가 1조 원가량 크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금 역시 맥주가 소주보다 훨씬 많이 걷힌다. 주세 총액이 4.7조 원인데, 맥주 주세가 2조 3천억 원, 소주 주세가 약 1조 7천억 원이다. 즉, 우리 정부는 맥주로 세원을 손쉽게 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주세는 간접세이므로 조세저항이 낮다. 정부 입장에서는 가장 수월하게 거둬들일 수 있는 세금이 바로 맥주에 붙는 세금이다. 그러므로 맥주 주세율을 다른 발효주에 비해 낮추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기혁은 맥주를 다른 발효주와 같은 30%로 낮췄다. 게다가 주세율이 70% 이하면 여기에 추가로 붙었던 30%의 교육세 역시 내려간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혁은 맥주에 붙었던 30%의 교육세 역시 와인과 같은 비율인 10%로 인하했다. 기혁의 개정안대로라면 세율이 아래와 같이 바뀐다. 


<현행법 → 기혁의 개정안>



이렇게 하면 맥주 값이 31% 이상 내려간다. 1,629원하는 맥주 한 캔이 1,117원, 4천 원하는 생맥주 한 잔이 2,760원으로 인하된다. 게다가 소규모 업자가 생산하는 수제 맥주는 생산단가가 높고, 유통비용도 많이 지출된다. 하여, 이들에게는 주세를 30% 아닌, 특별세 개념으로 4%만 부과하기로 했다. 


자, 이제 기혁의 법안대로라면, 맛있는 크래프트 비어는 싼값에 널리 유통되고, 대기업 맥주의 질은 향상된다. 게다가 세율이 낮아지기 때문에 크래프트 비어는 물론, 대기업 맥주도 지금보다 싼값에 마실 수 있다. 선택은 철저히 소비자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선택의 기회가 다양하게 제공되어, 소비자가 주권을 합리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기혁은 국회 본관 7층을 걷고 있다. 길게 늘어선 일자형 복도와 지층 단면을 품은 듯한 대리석 벽, 그 위에 매달려 있는 사각형 형광등, 그 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매끈한 바닥, 이 바닥 위를 걷고 있다가, 짙은 갈색 문 앞에 섰다. 문 앞에 선 기혁의 손에는 현직 의원 10명의 도장이 찍힌 서류가 들려 있다. 서류를 든 기혁은 국회 본관 701호, 의안과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뚜벅뚜벅 들어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민중당 장기혁주세법 개정안 제출합니다




                                                                                  *



자네지금 얼마나 큰 사고를 친 줄 아는가!


병실에서 환자복을 입은 정민은 거의 호통치듯 말했다.

이제 겨우 안정을 취한 그다. 자칫하면 병세가 더 악화될 것 같아, 정민은 뒷목을 잡고 말을 했다. 


대한민국은 광산이라고!


광산이라니요?


기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다이너마이트가 잔뜩 심어진 광산 막장 말이야큰 거 하나를 잘 못 건드리면 다 따라온단 말이야.


큰 거 하나라고요다 따라온다고요


기혁은 정민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정민이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가슴을 치며 호통하듯 말했다. 


자넨적폐도 모르는가?!


불과 한 달 전, 정치9단이자 전략가인 정민에게 ‘정치 천재’라며 탄복을 자아내게 했던 기혁. 그는 과연 정치 천재일까. 아니면 맥주 밖에 모르는 그저 그런 녀석일까. 기혁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있다. 그것은 바로 한 잔의 훌륭한 맥주만 있으면 행복해진다는 것. 그리고 하나 더, 약속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하지만, 이미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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