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맛없는 맥주를 만드는 자는 누구든지 똥더미에 던져진다.”
- 11세기 단치히 시(市)의 칙령
#8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창사 25주년을 맞아 중앙방송이 마련한 특집 생방송 국민 대토론. ‘제20대 국회, 혁신국회인가, 식물국회인가?’를 주제로 토론하겠습니다.
사회자는 기혁이 땀을 흘리건 말건 방송인답게 큐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오프닝 멘트를 했다.
- 이번 회는 첨예한 주제인 만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도 생중계를 합니다. 해외에 계신 교민은 물론, 동시통역을 곁들여 외신기자들과 해외 네티즌들도 볼 수 있도록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기혁은 속으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를 두고 국제적인 망신이라 해야 하나.
- 오늘 수준 높고 열띤 토론을 위해 나오신 분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한국당 김정태 의원, 국민당 박중선 의원, 다음은 진보당 노희천 의원, 그리고 민중당의 장기혁 의원 나오셨습니다.
사회자가 패널들을 한 명씩 소개하자, 모두 차례대로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기혁은 차례가 되자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고개를 들었을 때 카메라는 자신만만하게 시청자를 향해 웃고 있는 초선의원을 비추고 있었다.
- 장기혁 의원은 오늘 특별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토론의 달인 유정민 의원을 대신해서 나와 주셨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웃는 걸 보니, 역시 자신감이 있나 봅니다.
사회자는 농담으로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기혁은 더 난감할 뿐이었다. 그러자 기혁은 더 어쩔 수 없어, 애매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 유정민 의원을 대신하다니, 역시 당에서 거는 기대가 큰 모양입니다.
한때 삼겹살 판이 다 타면 판을 갈 듯이, 정치판이 부패하면 판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진보당의 노희천 의원이 한 수 거들었다. 예전부터 민중당과 진보당은 간혹 정략적으로 공조를 하곤 했는데, 오늘 그럴 것이란 시그널을 보낸 셈이다.
그나저나, 그 시각 토론의 달인 유정민 의원은 토론석에 앉아 명석한 뇌가 생산하는 강력한 논박을 쏟아내는 대신, 변기에 앉아 예민한 장이 생산하는 우렁찬 소리를 쏟아내야 했다.
- 아, 아닙니다. 저는 그냥 떠밀려서 이 자리에 나왔을 뿐입니다.
어리둥절한 기혁은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아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야당 저격수라는 공안검사 출신의 한국당 김정태 의원이 쏘아붙였다.
- 국회의원 선거에서처럼 말이죠?
- 벌써부터 뜨거운데요. 여러분 열기를 잠시 식히시기 바랍니다. 아직 제가 오프닝도 안했습니다.
매해 신뢰도 1위로 선정되는 언론인 손성희가 농담을 하자, 스튜디오에 초대된 시청자 패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 제20대 국회는 16년 만에 역사적인 여소야대 정국을 이뤘습니다. 이제, 20대 국회가 민심대로 흘러가는 혁신적 국회가 될 것인지 그 여부에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는데요. 논란이 되는 건 바로 지난 18대 국회가 정한 ‘국회선진화법’입니다. 과반 이상 차지하는 당의 독재를 막기 위해 ‘쟁점법안’은 국회의원 정족수의 5분의 3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가 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대로 하자면, 20대 국회에서는 총 180명의 국회의원이 찬성을 해야 ‘쟁점법안’이 통과됩니다. 현재 여당이 122석, 야 3당이 167석, 여야 어느 누구도 180석을 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여당이 반대할 경우 모든 법안이 계류되는 이른바 ‘식물 국회’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기혁은 식은땀이 났다. 머리 위에는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사회자의 말을 듣고서야 가까스로 토론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했다. 허겁지겁 자리에 놓인 대본을 펼쳐보니 정민이 정리해놓은 자료들이 무수히 쌓여 있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료를 펼쳐보니, 유치원생이 장난을 친 것처럼 심각한 악필의 메모들이 잔뜩 있었다. 다들 아는 말이지만, 천재는 악필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제야 밝히지만, 정민은 사실 유년시절 천재였다. 그런데 그 누구도 자신이 천재라는 걸 알아주지 않자, 유년 시절 악필로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하려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그 천재성이 몸에서 점차 빠져나갔지만, 악필만은 그대로 고수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이 한때 천재였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정민의 악필 때문에 기혁은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졌다. 귓속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부신 조명과, 간간이 웃고, 화를 내고, 침을 튀기며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서 박수를 치며 웃거나, 경청하는 패널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대개 진보당 노희천 의원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시청자 패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노희천 의원의 발언이 끝나면 김정태 의원이 질세라 반박을 했고, 간간이 제3당인 국민당 박중선 의원이 누구의 편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말로 생존 사실을 알렸다.
- 국회 선진화법을 입법한 게 바로 저희 한국당입니다. 저희가 다수당이던 시절에 다수당의 독재를 막자고 도입한 법 아닙니까!
김정태의 말을 듣고, 노희천 의원이 반박했다.
- 맞습니다. 한국당이 도입했습니다. 한국당이 이렇게 결과적으로 좋은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자승자박한 꼴이 돼버렸어요. 좋은 일도 불순한 의도로 시작하면 제 꾀에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또 한 번 시청자 패널 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한국당 김정태가 노희천을 간첩 바라보듯 노려보며 반박했다.
- 무슨 말입니까?! 불순하다니요!
- 제가 하나 읽어보겠습니다.
“비겁한 말씀을 좀 드려야겠는데 …사실 그 때 저희는 19대 총선에서 패배할 것으로 전망을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과반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고. 그런데 막상 선거를 하니 저희가 이겨버린 겁니다.”
누가 한 말인지 압니까.
- 모릅니다.
- 그럼 힌트를 드릴게요. 2014년에 한국당이 헌법재판소에 ‘국회 선진화법 권한쟁의 심판청구’했지요?
- 네. 했습니다.
- 그때, 한국당 주호용 의원이 한 말입니다. 19대 총선에 질 것 같으니까 법안 발의해놓고, 정작 이겨서 다수당 되니까 난감해진 거 아닙니까!
노희천 의원이 다그치자, 김정태 의원이 응수했다.
- 그래도 한국당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 법안 통과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노희천 의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퍼붓기 시작했다.
- 네. 통과시켰죠. 그게 총선 공약이었으니까요.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한국당이 내세운 비상대책위원장, 그러니까 현 대통령이 총선 승리 공약으로 내건 게 바로 ‘국회선진화법’ 아닙니까. 그런데, 한국당 의원 대부분이 실상 총선에 이기고 나니까, 입법 반대했죠. 당론 분열되고, 내분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왜 통과됐습니까.
노희천 의원은 시민 패널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선에 나가야 하니까,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찬성표를 던지고, 그러니까 대선후보 눈 밖에 나기 싫은 의원들이 모조리 찬성표 던진 거 아닙니까.
- 무슨 소리요! 그런 주장이 어딨소.
노희천 의원은 김정태 의원의 반발에 아랑곳 않았다.
- 또 하나 읽을게요.
“당시 권력자가 찬성표를 던지자 반대하던 의원들이 모두 다 찬성으로 돌아버렸다.”
이게 며칠 전까지 당대표 지낸 한국당 김문성 의원이 한 말입니다. 지난 4월 19일자 한국일보 보도예요. 이래놓고, 실제로 도입되니까 불리해져서 폐지하자고 하는 게 바로 한국당입니다. 자, 반박해보세요.
공안검사들의 임무가 무엇인가. 바로 간첩을 잡는 거다. 그럼, 특기는 무엇인가. 그건, 잡을 간첩이 없을 때 간첩을 만드는 것이다. 즉, 활을 쏴야 할 대상이 보이지 않으면, 아무나 하나 잡아서 그놈에게 활을 쏴버리는 것이다. 전직 공안검사의 눈에 사냥할 새끼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 저희뿐입니까. 지금 민중당도 다수당이 되자마자 개정하자고 합니다. 오늘자 보도로 이종길 원내 대표가 국회 선진화법 개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게 국회를 활성화 시키는 법입니까. 식물화 시키는 법입니까. 민중당 장기혁 의원 대답해보세요.
기혁은 갑작스러운 소환에 목에 사레가 걸릴 만큼 놀랐다.
- 이… 일하는 국회가 되어야 하죠.
- 일하려면, 국회선진화법을 폐지하거나, 개정해야죠.
김정태 의원이 사냥에 성공했다는 듯이 기혁의 말을 낚아챘다.
사회자와 토론 패널, 그리고 시민패널의 눈이 일제히 기혁에게 쏠렸다. 그리고 카메라도 기혁을 클로즈업했다. 작동중임을 알리는 붉은 램프가 보였다. 그 램프를 보자, 거실에서, 회사에서, 역 대합실에서 TV를 보고 있을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이 기혁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혁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 저는 잘 모릅니다. 정말이지 기본 밖에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아주 기본적인 겁니다.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정도입니다.
- 그게 자랑입니까. 그리고, 지금이 뭐, 사회 시간입니까. 장기혁 의원은 더 이상 백화점 교양강좌 강사가 아니에요!
김정태 의원의 면박에 시민 패널 몇 명이 큭큭 대며 웃었다.
기혁은 자세를 고쳐 앉고 말했다.
- 그러니까, 그게……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공화국이란 뜻 아닙니까.
기혁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말히기 시작했다.
- 다들 아시겠지만, 그럼 민주주의는 백성 ‘민(民)’자에 주인 ‘주(主)’자를 씁니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뜻 아닙니까. 영어로는 Democracy. 어원인 그리스 어로는 ‘demo’ 즉 ‘국민’이 ‘kratos, 지배한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국민이 주인 되고, 국민이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인인 국민의 뜻을 따르면 됩니다. 주인은 일꾼들이 발전을 위해 이렇게 토론하는 건 좋아하지만, 서로 싸우는 건 싫어합니다. 협력을 위해 악수하는 건 좋아하지만, 감시를 피해 뒤에서 검은 악수를 하는 건 싫어합니다. 신중하게 논의하고 면밀히 검토하는 건 좋아하지만, 몇 년 째 정쟁으로 법안이 계류되다 폐기돼버리는 건 싫어합니다.
- 그걸 장 의원이 어떻게 아시죠? 이십분 전에는 떠밀려서 이 자리까지 오셨다고 한 게 기억나는데요.
사회자가 토론 중에 끼어들어 질문했다.
- 정치라곤 아무 관심도 없는 양반이 어찌 안 단 말이오!
사냥꾼은 새 토끼를 물어 찢을 기세로 공박했다.
- 맞습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 저 빼고는 모두 3선, 4선 의원입니다. 국회의원 되기 전부터 정치에 뜻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적하셨다시피 정치에 뜻이 없었습니다. 정치에 관심도 없고,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 눈에 보인 건 지지율이나 득표율 이런 게 아니라, 어느 집 밥값이 싸냐, 어느 집 맥줏값이 싸냐, 어느 동네가 월세가 싸냐, 이런 거였습니다. 나는 이런 고민하고 있을 때, TV를 틀면 정치인들은 매번 당론이 어떻다, 누가 대표로 자격이 있다 없다 싸웁니다. 멱살을 잡고, 명패를 던집니다. 그때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참 한심하다. 정치인들 참 한심하다.
기혁은 한숨을 쉬었고, 김정태는 붉으락푸르락했다.
- 그런데, 제가 지금 한심하다고 생각한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한심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 말 돌리지 말고 자기 의견을 밝혀주세요.
국민당 박중선 의원도 끼어들었다.
기혁은 패널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 국회 선진화법 유지해야죠. 유지하고도 일해야죠. 정치는 여야 떠나서 국민이 행복한 일을 하는 거 아닙니까. 국민이 바라는 일이라면 여야가 함께 어깨 두르고, 손잡고, 발맞춰 걸어가야죠. 민주주의는 선거로 이뤄지고, 권력은 투표권을 가진 국민으로부터 나오니까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니까.
그러고 잠시 멈추었다, 첨언했다.
- 아, 이건 헌법 1조 2항이네요. 아는 게 기본 밖에 없어서요.
기혁은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김정태 의원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다짜고짜 따졌다.
- 아, 그럼 무슨 일 할 겁니까? 초선 의원이 뭘 한단 말이오?!
- 글쎄요…….
사실, 기혁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 말씀대로 국민들의 안녕을 위해 일해야죠.
초선의원의 대답에 김정태와 박중선 그리고 시민 패널들이 웃었다.
- 아,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 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기혁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답했다. 그러자 김정태는 더욱 심기가 거슬려 방송이건 뭐건 상관없다는 듯 꾸짖으며 말했다.
- 국민의 안녕은 경찰과 군인이 지키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안녕을 빈단 말입니까. 뭐, 기도라도 한단 말이에요?!
기혁 역시 성이 나 김정태에게 몰아치듯 따졌다.
- 국민이 진짜 바라는 일을 할 겁니다!
- 아, 그래서 그게 뭐요?!
김정태는 대놓고 비아냥 거렸다.
기혁은 재빨리 다급한 대로 정민의 자료를 뒤적거렸다. 원래는 ‘근로자 노동시간 개정법’, ‘대기업 청년 고용할당제’, ‘교과서 검증제’ 등의 방안이 빼곡히 인쇄돼 있었으나, 그 위에는 한때 천재였던 정민의 몸부림 같은 악필이 짙은 안개처럼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물론 같은 시각, 악필의 천재 정민은 여전히 변기에 앉아, 아까보다 더욱 우렁찬 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기혁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료를 뒤적거리며 일단,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했다.
- 정치로 국민의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야 합니다. 안녕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행복하지 않는데, 다른 걸 바랄 수 없습니다.
- 일하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장기혁 의원! 빙빙 돌리지 말고 무슨 일 할 건지 말해보세요!
김정태 의원이 탁자까지 치면서 말하자, 기혁은 자신도 모르게 그저 반사적으로 툭 내뱉고 말았다.
-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 생산국이 되게 할 겁니다!
갑자기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회자도 의원 패널도, 시민 패널도 모두 일순 얼어붙어버렸다.
- 주세법을 개정할 겁니다. 효모법을 발의할 겁니다!
기혁은 말을 해놓고 어질했다. 효모법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일단 호언하긴 했지만, 사실 그저 툭 튀어나온 말이기에 스스로도 과연 효모법이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기혁이 누구인가. 바라는 것도, 원하는 것도, 생의 거대한 욕망도 없지만, 맥주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고, 맛있는 맥주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닌가. 단 한 잔의 훌륭한 맥주만 있으면 행복한 남자, 35세의 장기혁은 정치 항로의 이렇게 막 첫 닻을 막 내렸다.
*
한편,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인 정민은 화장실을 나서려는 찰나, 뱃속이 또다시 요동치는 고통을 느꼈다. 강력한 지진 다음에는 항상 여진이 따르지 않는가. 하여, 열었던 화장실 문 손잡이를 채 놓기도 전에 다시 문을 닫아야 했다. 화장실 문을 여닫기를 수십 분 째 반복, 마침내 지옥에서 탈출한 정민은 토론의 달인답게 생방송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어코 방송국 앞의 약국을 향했다. 정민의 눈에 마침 신호가 녹색인지라 길을 건너려는데 아뿔싸, 그만 차에 치여 버렸다.
이제야 밝혀 미안하지만, 유정민은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에다 적록 색약증 환자였던 것이다. 탈수증에 걸릴 만큼 수분과 기운을 몸에서 다 빼낸 정민은 집중력이 흐트러져 그만 녹색과 적색을 아예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늦은 밤 아닌가. 하나 더 밝히자면, 정민은 야맹증까지 있다. 하여, 빨간 불이 켜진 가운데 횡단보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정민은 몇 분 뒤 응급차에 실려 호송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물론, 생방송 토론은 계속됐다.
‘Show must go on’이라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