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목욕
백수가 된 지 어느새 한 달, 가끔 월급이 따박따박 찍히는 삶이 어땠나 돌아보곤 한다. 짧은 직장생활에서 느낀 건 워라밸의 어려움이었다. 아무리 집중력 있게 일해도 종종 야근을 피할 수 없었고, 왕복 3시간의 출퇴근길은 저녁 식사를 9시에나 가능하게 했다. 하루하루가 그저 피곤했다. 업무가 그렇게 지독했던 것도 아닌데, 퇴근 후까지 진득하게 달라붙는 작업 생각은 꽤나 성가셨다.
잠들기 바쁜 일상에 익숙해질 즈음, 난 목욕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자주 행복하고 싶은데 문화생활을 즐기기엔 시간도 체력도 퍽 타이트한 데 비해, 목욕은 꽤 괜찮은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새하얀 욕조, 가득 찬 수증기와 깔리는 로파이 음악까지. 귀가와 동시에 욕조에 버블 바를 꺼내놓고 따뜻한 물을 받는 게 매주의 루틴이었다. 유난히 힘든 날이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때부터 여유가 좀 생겼던 것 같다.
가끔은 밤에 한 번씩 목욕을 하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매일 아침 샤워를 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버블 바만 해도 가격이 만 원 선이었고, 이렇게 매주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는 게 맞나 싶었다. 결코 저렴하지 않은 비누가 물에 닿자마자 녹아 없어지는 걸 볼 때면 알 수 없는 마음이 들어서 이렇게 돈을 써도 되나 하는 괜한 자기검열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배스 밤을 쪼개고 물을 받고 있었다.
목욕을 할 때만큼은 어쩐지 내 구석구석을 보살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씻는 것을 넘어 미뤄둔 고민을 마주하는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종일 남의 일만 해결하다가 내 마음도 드디어 봐주는 느낌은 퍽 위로가 됐다. 그런 시선이 절실했고, 비록 내 것이지만 따뜻했다. 그냥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해소되는 감정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목욕은 내게 생각할 시간이고, 스스로 해주는 대접이자, 무료한 일상의 유일한 낭만이다. 그래서 목욕을 좋아한다. 생각 사에 찾을 색을 붙어 ‘사색’이라 한다. 정서를 살피는 일이라면 역시 이만한 게 없지 않을까. 우리는 종종 가족과 연인의 상태는 세심히 살피면서도 정작 본인의 상태는 다 망가지고 나서야 알아채곤 한다. 하지만 세상에 나 자신보다 중요한 게 얼마나 존재할까. 자주 씻고 자주 사색하자. 마음을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포근하다.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June 13,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