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5학년실화냐' 4편
마감을 했다. 졸업 설계 마감이니 장장 5년간의 레이스가 끝이 난 것이다. 더는 꼴딱 밤을 새고 대낮에 들어갈 일도, 3시간쯤 자고 나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다. 편의점에서 달에 몇십씩 쓸 일도 없을 것이다. 사실 진짜 끝은 2학기 종강날에야 오지만 졸업 전시 준비는 얼추 마무리가 됐으니 이 정도면 ‘끝’이라 불러도 되지않을 까. 이제부턴 8시에 일어나고 11시엔 잠드는 삶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마감 직전, 한 편의 잡지를 읽었다. 이번 호 타이틀은 <오늘도 야근을 마치고>. 글들이 참 좋았는데,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나의 밤샘에는 그들과 동류의 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삶에 대한 고찰 뭐 그런 거 말이다. 내가 글러 먹은 인간이기 때문인지, 잡지의 주제가 밤샘이 아니라 야근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잠을 못 잘 때면 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욕을 중얼거리며 방으로 기어들어 간다. 밤을 새우고 점심시간쯤 들어가는 길이면 허리는 끊어질 것 같고 ‘지금 들어가도 3시간이면 많이 자고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 또 ‘오늘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할 게 많이 남았지’라는 고민에 머리가 아프다. 그런 연유로 어느 순간부터는 안자고 48시간 60시간씩 살아가는 짓은 하지 않는다. 대신 설계실에서 살며 매일 서너시간씩이라도 꼬박꼬박 자기로 했다. 이번 졸업 설계 마감 때 한 선배는 5일간 집에 못 들어갔다.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워라벨을 챙긴 셈이다. 하지만 겨우 3시간씩 자는 것이 워라벨을 지키는 일이라는 게 슬픈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아예 설계를 놓지는 못하는 것이, 가끔은 구질한 옛사랑을 하는 듯한 기시감이 들 때도 있다. 건축을 사랑이라고 칭하기엔 실로 마음이 그 정도였는지, 너무 감성적인 말이 아닌지 오글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만큼 끝까지 놓지 못했던 게 내 인생에 사랑말고 더 있었던가. 바닥의 바닥까지 보고나서도 놓지 못하고 너덜거리던, 시간이 만드는 무력감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던 어느 날. 아무리 시선을 따라잡으려 해도 자꾸만 멀어졌던 그와 이 망할 전공은 참 닮아있다. 다른 점이라면 바닥을 보이는 것은 나뿐이고 건축은 늘 굳건하고 아름답게 서 있다는 것.
사실, 5년간 배운 것을 생각해보면 너무 많다. 농담처럼 아무것도 못 배웠다고 해댔지만 진지하게 생각하면 너무도 많이 배웠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지경이다. 앞으로 남은 배움 역시 끝이 없고, 잘하는 사람이 깔리고 깔린 판에, 그들보다 열심히 할 자신조차 없다. 그래서 모든 게 자주 질투 나고 미웠더랬다. 어쩜 그렇게 결정을 잘도 내리는지, 분명히 내가 더 열심히 한 것 같은데 깔끔하게 시간을 맞춘다거나, 저비용 고효율의 pt를 해내는 능력은 어째서 내 것이 아닌지. 아무리 옆에서 봐도 못하는 것을 척척 해내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선배였다가 유명한 건축가였다가 이름 모를 어린애였다가를 반복했다. 가끔은 설계 그 자체가 미움의 대상이 될 때도 있었다.
더 화가 났던 것은 10시간을 투자한 것보다 그냥 급하게 10분 만에 그려간 게 더 칭찬받을 때였다. 칭찬한 교수나 친구가 아니라 보는 눈이 없는 내게로 화살은 향했다. 솔직히 이제껏 살면서 이 취향이 잘못됐다거나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한 적은 정말로 없다. 늘 까다로운 취향에 대해 묘한 자부심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아왔으며, 대체로 나는 그런 것에 있어 내가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건축은 당최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들도 다 놔줘야 할 때가 왔다. 5년간의 열등감 레이스도 끝이 난 것이다.
‘시원섭섭’이란 말이 정확할 것 같다. 내겐 건축계에서의 더 이상이 없다는 게, 가슴팍에 건축가나 디자이너 타이틀을 붙일 수 없다는 게 아쉽다. 열등감 외에도, 잊을만하면 불합리가 합리가 되는 학과분위기나 몇몇 사람들의 태도는 애진작에 날 아주 질려버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과 배움을 정말 많이 얻었다. 아마 다시 돌아간다면 여기 말고는 갈 데가 없지 않을까. 흰 벽을 타고 떨어지는 빛과 휘어지는 나무가 만드는 그림자, 매끄러운 바닥을 타고 다니는 분주한 사람들은 더는 내 것이 아님에도, 나는 어쩐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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