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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설 《흰》에서 영감을 받은 전시 '인 메모리'

실로 엮은 기억의 바다, 시오타 치하루 전시 'In Memory(인 메모리)' 회상


언젠가 가나아트센터에서 감상했던 시오타 치하루의 전시 'In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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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흰색 실로 완성된 설치 작품 'In Memory'는 흰색 공간의 중심에 배 한 척이 자리하고 그 안에 흰 옷 세 벌과 종이조각들이 걸려 있다. 하나의 우주 공간이 완성된 것. 흰 실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잇는 기억을 의미한다.

한강의 소설 《흰》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된 이 작품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십분 반영돼 있다. 작중 막 낳은 아이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이를 부여잡고 "죽지 말라"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외침이 두 번의 암 투병으로 유산의 아픔을 겪은 작가의 사적인 기억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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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엉키고, 얽히고, 끊어지고, 풀린다. 이 실들은 인간관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끊임없이 나의 내면을 반영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인간관계와 닮았다고 말한다. 혈관처럼 이어진 실타래는 유기적인 사회 공동체를 연상케 한다.


이 밖에도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덤에서 느낀 죽음의 공포, 이웃에서 내다버린 불에 탄 피아노의 형상, 잦은 이사로 겪은 강박, 항암 치료 과정에서 경험한 몸의 감각 등 지극히 사적인 기억들이 담겨있다. 기억과 트라우마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고 특유의 수행적인 설치미술로 존재와 죽음에 대해 사색해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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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또는 희망찬 미래를 바라며 전진하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해요. 때로는 기억의 바다를 헤매기도 하죠. 하얀 실 사이를 채운 종이들은 누군가의 일기일 수도, 메모일 수도 있어요. 죽어서도 존재하는 사람들의 기억들이죠.


한강 작가 소설 《흰》


세상 모든 흰 것들에 대한 사색이 담겨있는 소설 <흰>. 사실, 이 책의 장르는 소설의 느낌보다는 시집과 가까운 인상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흰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는 작가, 한강.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흰' 것들은 순수하고 순결하며 그 어떠한 더러운 것들도 침범할 수 없는 것들과 맞닿아 있다.

소설을 위해 작가는 온갖 흰 것들을 끌어모은다. 강보, 배내옷, 안개, 젖, 성에와 서리, 눈과 만년설, 소금과 각설탕, 흰 새와 개, 백발과 흰 뼈, 구름과 모래, 백열전구와 불빛들 등…. 소설에서 활용된 총 65개의 '흰' 소재들은 언뜻 보면 이질적이다. 결코 연장선상에 놓인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흰>에서는 이 소재들 모두가 '하나'로 이어지고 결국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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