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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Sep 16. 2019

파리의 친절한 인종차별


톨레랑스의 나라.

문학과 영화 속에서 만난 프랑스는 내게 그런 나라였다. 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나라의 우아함이 그 관용에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포용하는 정신이 분명 파리에 있을 것이라 여겼다.


실제로 파리 지하철 통로에서 캐리어를 끌고 출구를 헤매는 내게 한 중년신사는 제스쳐로 출구쪽을 알려주었고, 모든 가게에서 만난 종업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역시 톨레랑스의 나라야, 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 곳에도 차별은, 있었다.


파리 지하철 전경. 생각보다 역한 냄새를 맡지 못했다.


전에 페미니스트 친구의 애인이 페미 감수성이 높은 걸 보고 그 비결을 물은 적이 있다.

"너의 정신교육 덕이야?"라고 물었을 때 뜻밖의 답을 들었다. "걔가 미국에서 대학나왔잖아. 거기서 동양인 남자로 살며 받은 차별 경험 때문에 여성이 사회에서 받는 차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듯 해."

그렇다. 동양인이 유럽, 미국 등지에서 차별을 피하기란 역시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파리에서의 차별은 사소하지만 깰 수 없는 종류였다.

파리 식당에 갈 때마다 매번, 그들은 동양인 여성인 나와 친구를 출구 가까운 쪽에 앉히곤 했다. 이런 묘한 차별의 법칙은 한국에서 온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함께 모여앉은 많은 동양인들에게 해당되곤 했다.

이 점 빼고는 모든 종업원의 서비스와 행동이 친절했고 좋은 기억을 주기 적당했다. 관찰하길 좋아하는 습관이 아니었다면, 식당마다 늘 동양인들이 출구쪽에 앉아 식사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을 수 있다.


파리 달팽이 요리 맛집 샤르티에에서도 우리는 출구 쪽 좌석에 앉아 식사했다.


파리처럼 많은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도 이런 차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해진다.


영화 기생충에서 이선균이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그 선,이 필요했던 것일까. 나 역시도 차에 너무나 관용적인 척하며 보이지 않는 차별을 행한 적은 없을까. 우리 사회 곳곳에 보이지 않는 관용의 한계는 얼마나 될까.


파리 마레지구 편집샵 메르시에서 찍은 메르시 에코백. 가격이 꽤 비싸다.


사실 톨레랑스의 의미는 너와 나의 차이를 인정한다,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차이의 긍정은 우리의 차이를 인정하니 내가 변화하겠다, 이상이 되어야 한다. 차이의 긍정에서 오는 변화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한 사회에서, 그리고 개인에게서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관용의 나라에서 느낀 차별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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