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억의 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혜 Jan 07. 2022

신축년, 안녕

정들까봐 무서웠던 모든 나날들, 안녕


내게 거저 주어진 것, 안녕

내게서 빠져나가버린 것, 안녕

서로 주고 받은 적 없는 빚도 안녕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예의바름도 안녕

인내심 같은 것들도 안녕


어둠이 내리면 불이 반짝 들어오는

골목길 가로등, 안녕

거대한 칼날 같던 그림자와

누군가 흘리고 간 녹슨 동전도 안녕


여름의 냄새 안녕, 죽은 벌레들 안녕

더는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바람을 애써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런건 애꿎은 어깨를 자꾸만 깎아내리는 일

길을 걷다가 남들과 스치기만 해도 아픈 일

나는 언제부터인가 한쪽 어깨로만 가방을 맨다

그마저 자꾸만 흘러내리네...  하염없는 생각, 안녕


생각의 낮에서 다시 생각의 한밤으로 건너가기 위해

오랫동안 서성였던 생각의 나룻터, 안녕


지독한 안개를 만나자 노를 강물 속에 던져버린

이상한 뱃사공도 안녕


나는 어떻게든 잘 도착했어요

여기는 도무지 그림 같지 않은 장소입니다

몸짓으로도 흉내낼  없는 풍경입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정신은 무섭습니다


머리를 풀어도 풀어도 가릴수 없네

가위를 가져다 머리를 자르고 잘라도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런게 진심이구나

눈이 붉도록 깨이지 않는 꿈도 안녕


나의 작은 , 안녕

 모든 표정을 끈질기게 주시했던 

나의 친애하는 창문도 안녕


 밖에서 내리 쏟아졌던 가을 밤비와

밤비를 박제하고 싶었던 마음도 안녕

어떤 날에는 눈감아도 보였던

텅 빈 하늘도 안녕


비눗방울처럼 방울방울

내려오던 어떤 목소리,

안녕히 지내? 안녕...


바야흐로 세상의 나무들이 자살을 시도할 때

나는 깊은 땅굴 속 지하철 안에 있었다

맞은편에는 젊은 엄마와 아이가 앉아 있고

엄마가 아이의 칭얼거림에 못이겨

아이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었을 때...


다음 역은 옥수역입니다, 방송이 들려오고

그건 마치 전생에서부터 출발한 목소리처럼 들렸는데

전생의 녹음된 음성을 거꾸로 재생한 것 같았는데...

어쩌면 그건 미래의 전언이었을까? 오지 않은 미래, 안녕


항상 화가 나 있는 계단들도 안녕

더러운 신발들도 안녕

잡으려 할수록 저만치 달아나버리는 길도 안녕


다시 찾은 사람, 안녕

아무 데서나 나를 향해 오고 있는 사람도 안녕

당신이 통과하고 있는 시간들이 궁금해


말할 수 없는 것들, 안녕

두 팔로도 안을 수 없는 것들, 안녕

역병처럼 몰아치던 눈(雪)의 시간들, 안녕


이것들을 줄이고 줄여서 단 한 문장으로 남겨야 한다

한 문장도 안녕, 정들까봐 무서웠던 모든 나날들 안녕



2022. 1.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