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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빈 Feb 01. 2019

'말한다'가 가지는 용기

영화 <아이 캔 스피크> (i Can Speak, 2017)

2019년 1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께서 별세하셨다. 고인이 되신 김복동 할머니는 '평화를 위한, 한 영웅의 발걸음'이란 수식어처럼 거침없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피해사실을 고백하기까지는 5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1940년 그가 일본군에 의해 연행되었을 때부터 1992년 그 사실을 폭로하기까지의 시간이다.


간단한 증언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증언은 매우 험난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52년이라는 시간이 그 고통을 암시한다. 47년 그가 고국으로 귀향한 이후부터 계산한다고 해도 45년의 세월이다. 격동의 현대사가 지나가는 기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그저 한 구석에 담아두고 살아갈 뿐이었다. '내가 그 피해자다. 그들은 나를 강제로 끌고 갔으며 그곳에서 나는 사람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성노예로 사용되었다'는 증언.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 자신의 피해를 공개하면서부터 다양한 곳에서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였다. 1993년 오스트리아 세계 인권대회에서 증언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며, 이 외에도 1992년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증언하였고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에서 증언하기도 하였다. 


1000번째 수요집회에 참여한 김복동 할머니. 출처 : 주간경향


그러나 4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선 이들의 이 힘겨운 증언을 믿어주지 않는다. 강제 연행을 부정하고 '성노예'가 아닌 '매춘부'로 격하시키며 이들의 피해를 외면한다. 자신들의 과거를 인정하고 발전하지 않겠다는 옹졸함의 소치다. 김복동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현재의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대하고,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하셨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제대로 된 사과를 보여주지 않았고, 오히려 '협상은 끝났다'며 자신의 옹졸함을 과시할 뿐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i Can Speak, 2017)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다룬 영화들 가운데 특히 이들의 증언에 주목한 영화다. 영화의 시점과 배경상 김복동 할머니의 사례는 아니지만, 세계 무대에서 증언했다는 점과 최근에 상영했던 영화라는 점에서 사람들이 많이 떠올렸다. 영화는 2007년 미 하원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 채택 과정에서 이용수, 김군자, 얀 오헤른의 증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었다. 한국적인 휴먼 코미디와 신파가 가득한 극이었지만, 그 소재를 다룸에 있어서 불필요한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현재의 피해자를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휴먼 코미디의 문법을 유지한다. 봉원 시장에서 사소한 민원들을 과도하게 제기하면서 공무원들을 괴롭히는 나옥분 할머니와 '원칙과 절차'로 대응하려는 명진 구청의 9급 공무원 박민재 주임의 갈등, 허름한 봉원 시장을 헐값에 매입해 강제로 재개발에 들어서려 하려는 건설사와 구청장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장 상인들 간의 갈등, 부모를 잃고 나이차 나는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꿈을 접은 민재와 그런 형에게 불만이 많은 영재의 갈등.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감독은 통속적인 '코미디'와 '신파'의 문법을 들이민다. 영화가 후반부의 반전까지 이어가는 스토리가 그렇기에 매우 지루하면서도, 이 사건이 매우 우리 일상 속에 들어설 수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이 신파와 코미디가 후반부의 큰 반전으로 이어진다. 그 반전은 각각 인물의 성장으로 나타난다. 전반부에 묘사된 인물의 모습들은 모두 개인만을 생각한다. 나옥분 할머니는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융통성 없이 시장을 들쑤고 다니는 모습으로, 박민재 주임은 책임지지 않고 구청장과 건설사의 숙원사업인 재개발을 시도하기 위해서 허울뿐인 소송을 제안하는 모습으로.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각 인물들은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주요한 통로가 된 것은 결국 '스피크', 이야기였다. 나옥분 할머니와 박민재 주임의 영어회화 과외를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감독은 이 '증언'이 가진 용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옥분 할머니의 신파를 집어넣었을지도 모르겠다. 민재를 통해 나옥분 할머니의 동생이 정작 할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고 알게 되었지만, 결국 할머니는 자신의 가장 큰 과거를 다시 '말해버리면서' 이야기를 한층 성장시켰다. 가장 위로가 되고 친한 구멍가게 진주댁에게도 공개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 자신의 부모조차 내내 쉬쉬하며 숨기려고만 했던 그 과거. 자신의 과거를 유일하게 지탱해주는 친구 정심이 쓰러지면서 나옥분 할머니는 결국 결심하게 되었고, 정심의 뜻을 이어가 미국에서 자신의 과거를 공개하고 증언하게 된다. 


특히 감독은 '나옥분'과 '정심'을 표현함에 있어서 가련한 피해자로 상정하지 않았다. 이는 특히나 이 영화가 증언이 가지는 용기와 힘을 다루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안에서 나옥분 할머니는 '착하고 약한' 주인공이 아니다. 처음은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는 '도깨비 할머니'로, 중간엔 영어 공부를 위해 좌충우돌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우리 곁에 흔히 볼 수 있는 굳센 할머니들 아닌가. 특히 그 모습이 가장 돋보인 모습은 하원 의회에서의 증언이 끝내고 할머니의 일갈이다. 증언에 용기가 필요한 것은, 증언에는 늘 공격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역시 의회에서의 증언이 끝나고 일본 측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나옥분 할머니를 향해 '얼마가 필요한 거냐'는 투의 비난을 던졌다. 이에 나옥분 할머니는 그들의 언어인 일본어로 시원하게 일갈한다. "너희들의 더러운 돈 따위는 필요 없다!" 할머니의 그 용기는 어쩌면 가장 큰 용기인 '말한다'를 거쳤기에 나올 수 있는 용기일 수도 있다.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로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운데 생존자는 23명으로 줄었다. 영화가 끝나면서 말하듯이, 여전히 이들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말함'으로서 누구보다 큰 용기를 보였다. 이제는 상대방이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말하고' 사과하는 용기를 보여줄 차례다. 아직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을 수 있기를 소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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