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숫자
라면은 5개들이, 요구르트는 10줄, 귤은 한 박스. 물건의 단위를 생각해본다. '원가'라든지 물류라든지 시장이라든지 그런 건 하나도 몰라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건 경험의 숫자이니까. 가질 때 적당한 만족을 느끼면서 다음 구매까지 덜 분주하게 만들어 준다.
귤을 5개씩 판다면 살 때마다 서운하고 라면을 한 박스씩 사야 한다면, 아무리 라면을 좋아해도 크게 기쁘지 않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마음도 살핀 값이 묶음의 정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접기용 종이는 왜 500장일까(20~30매의 미술 공작용 종이는 과감하게 제외하자). 최소 100장 단위 묶음으로 선보이는 종이의 세계. 종이를 사는 일이 거의 없는 세상, 어쩌다 종이를 사게 된다면 한 번에 왕창 가져가도록 하는 전략인가. 손을 놀게 두면 큰일이 나는 세상에서 손을 놀게 하는 일을 근근이 이어가 보려는 기획자의 마음일까.
지금까지 수백 장을 접었지만(?) 아직도 수백 장(!)이 기세등등하게 남아 있다. 아마 종이가 50매들이였다면 종이접기는 일찍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저 많이 접힌 채로 말이다. 이 거대한 숫자의 의미는 접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종이 한 장 드는 일의 어려움
처음은 도장을 깨듯 매일 접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 '종이를 접어야지'라는 마음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냥 접으면 되는 거 아니야?' 나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세상사에 문제 될 일은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종이를 접기도 전에 만나게 된 어려움은 내가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데 있었다. 그건 차원의 문처럼 가끔씩만 열렸다. 만족스러운 오늘과 걱정되지 않는 내일이 예상될 때, 그 사이에만 말이다. 그러지 않고 만지는 종이는 정말로 무거웠다. 전혀 상관없는 절차도 필요했다.
이를테면 목욕 같은 것. 종이를 만지려면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목욕까지 끝마칠 정도로 주변의 모든 일과를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1. 할 일은 다 하고 접는건가. 2. 왜 접는가 3. 접어서 뭐할건가. 어떤 쓸모도 증명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목욕까지 하게 된다.
그러므로 꽃무늬 용과 고상한 공작 등이 대거 무리를 이루고 있는 이 사진은, 일년 동안 주어진 몇 개 안되는 굉장한 시간이 모두 모인 결과이다. 그러니 더욱 감동적으로 감상해주길 바란다.
평균 1주일 하고도 1시간 5분
그렇게 종이 접기 방법은 총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접어볼까', 라는 마음을 모은다(소요시간 1주일) 2. 붙박이장 속 예쁜 종이를 꺼내 마음에 드는 종이를 고른다(소요시간 5분) 3. 접고 싶은 대상(대개는 동물)을 골라서 접는다(소요시간 20분-1시간). 뭐 하나 접는 데 대략 1주일 1시간 5분이 걸리는 것이다. 정말이지 시간이 많이 드는 취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종이접기가 3번째에서 바로 시작하는 줄 알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스울정도로 쉬운 시작
그러나 일단 잡기만 하면 누구나 시작 할 수 있는 게 접기의 매력이다. 정사각형 종이로 처음에 접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두 가지 뿐이기 때문이다. 1) 직사각형으로 접거나 2) 직각삼각형으로 접기. 1시간이 넘게 걸리는 전갈을 접거나, 5분도 채 안 걸리는 종이배를 접어도 시작이 같다는 사실은 인생을 은유한다. 쉬운 접기나 어려운 접기도 출발선상이 같다는 점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어려운 접기도 한 걸음부터라거나, 누구나 굉장한 것을 접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거나. 이 평범하고 쉬운 시작은 모든 초심자들에게 용기를 준다.
안 좋은 소식
그러나 안 좋은 소식도 있다. 쉬운 것은 금방 끝난다는 점이다. 5번 정도 순서를 진행했다면 보고 따라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눈은 아까부터 모든 것을 다보고 있지만, 보기만 할 뿐이다. 머리는 이해하는 척 하지만 거짓말이다. 손은 분주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여기까지는 잘 따라왔는데 왜 다음이 안되는지 모르겠다. 영상을 몇 번 돌려보아도 못 접는 사태가 일어난다. 접기는 사실 많은 실패를 가져온다. 다양한 예가 있지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패는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접어들 때 생긴다.
어째서 평면에 깊이가 생기고 마침내 일어서게 되는지, 이제껏 예쁘게 잘 접어오다가 석연치 않게 종이를 뒤집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2차원을 3차원으로 만들 때, 머리는 믿지 못하고 눈은 놀라며 손은 용기내지 못한다. 종이접기를 개발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에게 닥친 이 진정한 변화는, 믿음의 영역이다. 미심쩍어하는 눈과 머리를 물리치고 끝내 손이 수행해야 한다는 점도 모두 의미심장하다.
당신 앞에 놓여 있는 500번의 시작
종이가 500매나 되는 것은 그 횟수만큼 반복하게 될 접기의 미리보기 같다. 아득한 횟수의 도전이어야 넉넉히 실패할 수 있고 하나쯤은 잘 접어낼 수도 있으니까. 500매의 숫자는 바로 이 '하나쯤'을 위한 엄청나게 많은 시작의 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숫자와 비슷하게 매년 도착하는 것을 이제야 떠올린다. 2023년과 함께 날아들어온 365개의 날씨들. 이렇게나 많은 숫자로 1년을 셈하는 것은 넉넉한 시작의 갯수인 셈이다.
해가 지는 걸 어쩔 수 없이 맞이하고, 조금은 막막하게 다음 해를 기다렸을 옛날 사람들을 생각한다.
오늘, 종이 한 장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