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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재 Jul 02. 2022

정신을 차리니 벌써 31주

임산부의 짧은 기록

여름이다. 매년 한 번씩 등록하는 서핑 초보 1일반에서 파도를 타고 싶은데 말이지. 보드 위에 누워 둥둥 떠다니는 것 정도 까지는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수트를 입고 벗기가 너무나 번거롭지 않을까. 임신 28주 차에는 그 번거롭다는 임신성당뇨가 있다는 확진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은 31주, 다음주 월요일이 되면 32주가 된다. 


그동안 짧게 짧게 썼던 메모장.


6/14 밤 12시 반 태동이 너무 심함 잠을 못 잘 정도. 모기도 어제부터 두마리째. 여름이 오고 있다.


6/15 태어나서 이렇게 편하게 살았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모든걸 주환이가 해준다. 저녁밥 빨래 청소 마사지 로션바르기 영양제 챙기기 그리고 방금은 타이레놀을 사러 나갔다. 내 편두통 때문에.


6/16 마땅이랑 엄마랑 이렇게 재밌는 프로젝트를 많이 했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우리는 2인 1조로 신나게 일했어. 마땅이가 조금 크면 뱃속에 있을때 만났던 이모 삼촌들을 만나서 너가 뱃속에 있을때 봤는데, 하는 이야기도 나누고 말이야. 오늘은 청소며 빨래 밥을 했는데 갑자기 화딱지가 났지. 낮에 로봇 청소기 왼쪽 바퀴에 휴대폰 충전기가 걸린 일 때문이려나. 임신이고 결혼이고 안했다면 가뿐한 몸으로 가볍게 일할텐데 하고 생각하니 짜증이 안날 수가 없잖아. 하루종일 모르는 동네, 집에만 있는것도 화가 나고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고. 일을 좀 끝내고 저녁이 되어 밥을 짓고 샤워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좀 괜찮아졌어. 그냥 혼자 산다고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그런 혹은 외국에 혼자 나와서 살고있다거나 하는 상상을 해보는거지 뭐. 마땅아 세상일은 참 생각하기 나름인가봐. 그나저나 거기는 어때? 지낼만하니?


6/19 마땅이를 사랑한다는 말이 마음에 잘 와닿지 않아서 주환이랑 둘이 이야기했다. 결국 낳아서 키우다보면 우리 부모의 사랑만큼 사랑이 생기지않을까.


6/20 만삭을 향해 달려가면서 생활반경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만큼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졌다. 주환이가 다정하고 반듯한 사람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모나고 화나고 예민하고 잔 짜증이 많은 내가 요즘은 떡볶이 김밥 냉면 라면 빵 오레오 자두아이스크림 스키틀즈 레드불 커피 하리보 양념통닭을 못먹어서 더욱 잔뜩 화가 나있는데 그런 나를 달래서 건강식을 먹이느라 고생하는 주환이. 


6/21 내일부터 비가 쏟아진다기에 오늘은 꼭 마감들을 해야겠다 다짐한 일들을 쳐냈다. 농사를 짓는것도 아닌데 비가 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던건 흐린 날엔 하루종일 너무 졸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밤 10시까지 정신이 없었는데, 7시에 퇴근한 신랑을 10시까지 못본체했더니 그만 삐져버렸다. 미안해.


6/28 오늘은 말이지 좀 이기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말이야 하루종일 비가 쏟아졌으면 좋겠다는거지. 바람도 매섭게 불어서 마치 태풍이 올것처럼 창문을 쥐어뜯고 비가 쏴아 쏟아지다 일순간 천둥이 치고. 나는 그런 장마의 한가운데에 누워서 에어컨을 틀고 건조기를 돌리고 고양이를 만지고 배를 다독이면서 넷플릭스를 보는거야. 온세상 사람들이 다 일하고 있을 오후 세시에 나만 누워서 빗소리에 살짝 졸면서. 


7/1 회사를 만들고나서 좋은점 하나는 재밌는 일을 댓가없이 할 수 있다는 것. 회사에 다닐땐 좋아하는 꼭지 하나를 쓰기 위한 댓가로 끔찍한 꼭지 4개 정도(사실 더 많다)를 쳐내야했다. 회사를 차리고 하는 일은 조금 덜 재밌거나 더 재밌거나인데, 성향상 클라이언트와 죽이 잘 맞으면 간도 쓸개도 막 꺼내다가 다 나누기 때문에 (이 경우 90%의 클라이언트는 나를 믿고 맡기면서 함께 간 쓸개를 꺼내듦) 대체로 대부분 재미있게 흘러간다. 지지고볶더라도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재미있었던 기억만 남아 다시 만나고 또 다시 만나고. 아직은 초보 꼬꼬마 사장이지만 마땅이 어린이집 들어갈 때쯤엔 더 믿음직한 거래처 사장님이 되면 좋겠다. 어제는 기운빠지는 일이 있어서 새벽까지 잠을 못잤는데, 그러다보니 오늘 하루종일 비몽사몽. 이래저래 내 손해밖에 더 되겠나 싶어서 기운을 차리고 힘을 내본다. 


7/2 동그란 머리. 동그란 귀. 여름에는 러닝셔츠를, 겨울에는 히트텍을 꼭 챙겨입는 단정한 친구. 자기 삶의 목표는 나와 마땅이, 그리고 고양이들의 행복이라는 사람. 낮잠에 푹 빠진 착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보는 주말.


노을이 예쁘다.









토요일 다음은 일요일, 그리고 32주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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