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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books Oct 10. 2022

빈틈있는 삶

빈틈있는 삶


동일한 하루, 동일한 24시간. 그러나 전혀 다른 일상들.


사회는 언제나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정체되지 않고 달음박질하게 만든다. 여유롭고 급할 것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도록 하고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요구한다. "죽을 때까지 배우지 않으면 도태된다", "120세 수명 사회에서는 60세도 새로 배우고 일해야 하는 나이이다." 사회에서의 도태는 곧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사람들은 이러한 겁박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은 단순히 쉬는 시간이 될 수 없다. 그 시간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배움의 시간이고 재사회화의 시간이다. 더 효율적이고 나은 일자리를 보장받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다. 순전한 의미에서의 쉼이란 없다.


하루를 어떻게 하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익숙했다. 주말에는 외주로 기획서 작업을 종종 하곤 한다. 주말 이틀에서 거의 20시간이나 할애해봤자, 고작 20, 30만원 버는 종류의 아르바이트 같은 일일 뿐이다. 그런데 끊기지 않고 외주 일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또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주말 시간을 기회비용으로 외주 일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진행해왔다. 그리곤 그 돈은 피곤해진 평일에 평소의 두세 배 정도의 커피와 간식 지출, 그리고 풀리지 않은 피로라는 비용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근무 중에도 어떻게 하면 잉여 시간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틈이 나 자기계발을 위한 서적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업무와 관계된 내용을 익힌다는 명목으로) 재무제표나 환율 관련된 책자들을 펼치고선 이리저리 생소한 경제 용어들과 계정과목들을 익히고, 감가상각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따위를 익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평소에 너무 문학이나 인문학 서적만 읽는 내 자신의 독서 편식을 의식하며 '실용적 쓸모'가 있는 배움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식적 행위인지도 모른다. 설령 주식을 하지 않더라도 다트 전자공시로 업계 여러 회사들의 사업보고서 등을 훑는 행위도, 정말 상사의 시장조사를 위한 지시사항이 아니더라도 자기만족적인 행위로 억지로라도 하고 있는 일일 터이다.


매사가 불안한다. 4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정상적인' 커리어 테크트리를 밟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일종의 주홍글씨처럼 되어 버렸다. 가끔씩 구직 사이트에 헤드헌터 노출용으로 이력서를 업데이트 하거나 외주 작업을 위해 형식적으로 포트폴리오나 이력서를 손보게 될 때마다, 이상한 자격지심 같은 것이 발동한다. 내가 가진 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력으로 앞으로 5년, 10년을 어떻게 단계 단계를 밟아 나갈 수 있을까. '존버'와 이직을 통한 '점프', 항상 머릿속 구상으로만 맴도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일들 사이에서 방황하다 좌절감마저 느낀다. 어떤 뾰족한 수가 없기도 하고, 이미 나는 이직이든 현재의 커리어를 쌓아하는 일이든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노력과 실제적으로 '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말했듯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단순한 현상유지나 열심히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는 금세 다른 이들에게 뒤처질 것이라는 관념이, 그리고 실제의 경험들이 단순한 노력 이상의 결과들을 요구한다. 잘 해야 한다, 뭐든. 그래야 현상 유지가 가능하다.  


빈틈없는 삶. 여가와 잉여의 시간조차 무언가 배우고 부가적인 일을 찾아 수행하고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들로 가득 찬 삶. 항상 100%, 혹은 그보다 더 무리해서 120%의 정력을 쏟아붓는 삶을 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삶의 변수들에 무척이나 취약하고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 번의 몸살감기, 한 번의 사고, 한 번의 주저함으로 엄청난 사회적 비난과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24시간을 미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몇 시간의 시간적 공백도 참을 수 없는 것이 돼 버린다. 그리고 그에 따른 손실을 경제적인 가치로 환원하고, 그것을 회복할 수 있도록 내일에는, 다음주에는 더욱 더 스스로를 혹사하여 보전하려는 마음을 갖는다.


그런 그에게 삶의 미묘한 변화와 사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저 모든 것들이 경제적인 가치로 계산되어 인식될 것뿐이라면, 가치 없다고 생각되는 쉼과 사색이란 그저 아까운 시간일 뿐이고 손해보는 행위일 뿐인데 말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렇게 많은 휴가를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일단 출산휴가 자체가 길었다. 나는 출산휴가에 더 많은 글을 읽고 쓰고, 더 많은 계획들을 구체적으로 세우는 매우 생산적인 기간이 될 것이라고 크게 오판했다. 조금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간단한 책 한 권의 원고 작업을 이번 기회에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회사에도 훨씬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도 회사 일에 전혀 소홀히 하지 않고, 오히려 아빠가 되었다는 심적인 여유로움을 한껏 더 뽐내며 일과 생활의 밸런스를 갖춘 직원의 모습을 보여주고픈 생각이 있었다. 백일은 금세 올 것 같았고, 이번 가을에는 올림픽공원과 코엑스에서 여유롭게 주변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고백하건데, 크게 잘못 생각했다. 아이가 새로 나와서 그 아이를 돌보는 일 자체, 그 존재 자체가 내 삶에 어떤 직접적이고 현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지 너무 안이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출산 이후로 두 달 이상의 이 시간까지, 내 생애에서 가장 적은 잠을 자고 기적 같은 초인의 능력으로 하루하루를 그야말로 버티는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 2년 반 동안의 군생활에서조차 이렇게 잠을 오랫동안 못 잔 경험은 없었다. 아이가 아파서 동네병원이나 응급실에 다녀온 일이 벌써 수 차례 된다. 이미 내 연차는 아이 병원으로 올해 남은 연차를 거의 소진한 상태이다. 중요한 출장과 업무 팔로우업을 놓쳐서 상사의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았다. 결국에는 내가 중요한 때에 부재하는 일이 있어 업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얘기까지 전해 듣게 되었다.


아이가 생겨남으로 일상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컨베이어 시스템처럼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한 일상은 전방향적으로 이리 튀고 저리 튀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모든 것이 맞춰짐으로써 모든 것들이 계획에서 벗어났다. 내 마음대로 계획을 세우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고, 이 시간에 무엇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무너졌다. 삶은 빈틈 투성이가 되었다.


다른 각도에서 일상을 바라보고 현재와 미래를 계획할 수밖에 없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항상 잉여의 시간들을 확보해야 하고, 그 안에 여러 변수값을 대입해야 함을 느낀다. 그리고 어떤 잉여의 시간이 생기더라도 단순한 고민으로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결단력 있고 재빠르게 일을 추진할 수 있어야 후회하지 않고 최대한의 원하는 결과에 근접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일상에 생긴 균열이 못 보던 것들을 살펴볼 수 있게 어떤 시공간을 열어둔 듯하다. 어차피 완벽히 기계적인 시간 관념으로 계획하던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과 유한한 재화, 소모되는 육체의 정도를 분명히 인지하고 어떤 것은 분명히 해야 하고 어떤 것은 분명히 포기해야 한다. 어떤 것을 분명히 포기할 수 있는 것, 빈틈이 있어야 인정할 수 있는 심사숙고의 결정이다.


어느 날 아이를 안고 부엌 창문 밖으로 목련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지켜봤다. 직사가 아닌 빛임에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바람의 촉감에 아이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바깥 풍경을 지긋이 지켜보는 모습을 바라봤다. 잠시간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몇 초간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눈망울을 보는데, 마치 내가 아이에게서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을 보고 배워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항상 지루함에 졸면서 읽어간)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그 서술들, 1초의 사건을 10 페이지의 서술로 설명하는 그 순간의 무한한 확장성이 아이의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관찰 속에서 경험되어진다.  

아이는 우리 가족의 삶 정중앙으로 깊숙히 균열을 내고 들어왔다. 그 만들어진 일상의 빈틈 속에서,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프로젝트 WBS 일정표에서처럼 정교하고 빽빽한 'things to do' 리스트가 해결해주지 못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돌파구를 다른 방식으로 찾아보려고 한다.


아이를 재우는 무한히 길고 긴 새벽의 시간 속에서, 다시금 순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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