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dy WOO Dec 31. 2020

엄마, 사랑해. 내 삶에서 사라져 줘

오모리 타츠시 감독 X 나가사와 마사미 주연 <마더>

 좋든 싫든 간에 살아있는 사람이라면(혹은 죽은 사람들조차도) 누구든지 인관관계를 맺고 있다. 친구 관계, 연인 관계, 직장 동료 관계 등등. 그중의 가장 처음 맺게 되는 관계가 바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이다. 흔히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선택이 아닌 천륜이 지어준 관계이며, 때문에 절대로 끊어서도 끊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존속범죄에 경우 가중처벌을 하겠는가. 하지만 여기 끊어야만 하는 천륜이 있다.

영화 <마더>의 아키코가 바로 그녀이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일본의 한 마을, 한 남자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고 길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런 아이에게 한 자전거를 탄 여자가 다가간다. 바로 아이의 엄마 아키코이다. 그녀는 아이를 다그치지 않고, 자신도 일을 땡땡이쳤다며 해맑게 이야기한다. 언뜻 보기엔 아이를 위하는 최고의 엄마처럼 보이던 아키코였지만, 하지만 얼마 안가 관객들은 그저 이 모습이 철없는 아키코의 모습일 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첫 장면에서부터 감독은 이들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잘 드러낸다. 같이 길을 떠나는 두 모자였지만, 아키코는 홀로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나아가고 슈헤이는 그녀의 뒤를 열심히 뒤쫓아 달려간다.

 영화는 2시간 내내 이런 모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파칭코를 하다가 갑자기 낯선 남자를 데려오지를 않나, 덜컥 그의 아이를 임신을 하는 등 대책 없이 돌발행동만을 일삼는 엄마 아키코이지만 슈헤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가 시키는 심부름(심지어 앵벌이, 범법행위까지)만을 하며 기다릴 뿐이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관계가 아닌가. 엄마가 아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아들을 방관하고 심지어 범죄까지 일삼게 하니 말이다. 관객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도 슈헤이를 안타까워하고 그녀에게 다들 한 마디씩 건넨다. 아키코의 부모, 자매, 그녀의 남자 친구들, 심지어 슈헤이의 친아빠까지. 하지만 그들은 말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스쳐 지나간다. 문제점을 인지하였지만 그 누구도 경찰에 신고를 한다던지, 적극적으로 슈헤이를 구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 복지과 공무원 아야가 뒤늦게 나타나 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도와주려고 하지만 "내 아이다"라는 아키코의 한 마디에 그녀는 힘을 잃고 만다. 아이가 부모를 버리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현실의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직까지도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범죄는 그저 가정사로 치부되며, 외부의 개입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지난해 중앙일보 기사*의 따르면, 자녀 학대보다 부모 학대 범죄에 가중처벌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는 특히 훈육이라는 명목 아래, 부모가 가하는 학대가 일부 정당화되고 있음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중앙일보 기사 : https://news.joins.com/article/23516240


 일부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어릴 때라면 몰라도, 클수록 자신이 부모보다 힘이 세지는 데 왜 그들에게 저항하지 못한 채 지속적인 학대를 당하냐는 것이다. 영화 <마더>는 이 해답이 '공의존 관계'에서 있다고 본다. 공의존 관계란, 특정 대상에게 과잉되게 집착하며 의존하는 관계 중독에 걸린 인간관계를 말한다. '애정'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을 구속하고 보살피며 자기 만족감을 높이는 것이다. 아키코는 '냄새가 나서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거야'라는 등의 말을 통해 슈헤이의 자존감을 낮출 뿐만이 아니라, 책 등 아들의 가치관을 넓힐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그를 통제한다. 때문에 슈헤이는 부모에게 거부해야겠다는 사고조차 갖지 못한 채, 그저 유일한 자신의 편이라 느껴지는 부모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완벽한 '가스라이팅'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이 보여주듯,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를 구제해주지 못한다. 부모의 지시와 세뇌에 의해 저지른 범죄일지라도, 자식의 증언 없이는 부모를 벌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뇌당한 자식들이 부모를 고발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이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영미권에서는 이미 이러한 문제 인식이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 자녀 학대에 대한 처벌이 엄격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처럼 장유유서, 효孝를 강조하는 유교사회 국가에서는 가족 학대를 뿌리 뽑기엔 아직 인식적으로나 사회 시스템적으로나 매우 부족하다. 그나마 희망적이라면 최근 한국의 <미쓰백>, 일본의 <아무도 모른다> 등과 같이 이러한 사회를 고발하는 목소리들이 주목받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영화 <마더>를 감상하는 2시간 내내, 불편함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답답한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비슷한 소재를 다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기분 나쁜 감정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아무도 모른다>가 남긴 여운과 <마더>의 여운은 그 결이 확연하게 달랐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물론 이 영화가 사회적인 측면에서 훌륭한 시도를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좋은 소재를 다뤘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스토리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마더>는 사이타마에서 실제로 일어난 조부모 살해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해당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대략 10년 정도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10년 동안의 사건을 모두 보여주려던 욕심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그저 일어났던 사건들을 툭툭 보여주었고, 사건과 사건 사이에 연결을 그저 '1년 후', '5년 후'라는 자막으로 간단하게 처리해버린다. 이렇게 그저 단편적인 사건들을 보고 싶었더라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지, 왜 극영화를 보겠는가. 일련의 사건들이 늘어지는 편집 방식은 도대체 그 인물이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흐름을 파괴하며, 극에 대한 몰입감을 깨버린다. 관객들에게 아키코와 슈헤이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인간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감독의 의도가 이거였다면 말은 달라지지만 말이다.)

 특히 엄마 아키코의 캐릭터에 대해서 이러한 문제점이 두드러진다. 슈헤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가는 '가스라이팅'으로 설명해볼 수 있지만, 아키코는 어떠한가? 아들에게 집착을 보이지만 도대체 왜? 감독은 프로덕션 노트를 통해 아키코가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집착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제대로 표현된 것일까. 아키코가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유희하는 장면은 4번이나 나오면서, 과연 그녀의 집착을 표현할 장면은 몇이나 됐을까.


 실사화와 하이틴 로맨스가 즐비하던 현재의 일본 영화계에, 영화 <마더>는 좋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던 영화였다. 특히 토호라는 대형 배급사에 나가사와 마사미라는 톱스타의 주연으로 관객의 관심을 충분히 끌 수 있었던 영화이다. <마더> 같은 사회파 영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충분히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었기에, 아쉬움이 더 짙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더>를 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최고의 영화가 아니라고 한들,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였고 또 이와 같은 영화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위와 같은 사회적 논제를 일부나마 인식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코로나로 인해 더욱 척박해졌을 작업환경이겠지만, 부디 좋은 사회파 영화들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응원한다.

영화 <마더> 현지 포스터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꿈을 응원 못 하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