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도 않은
있지도 않은 형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 여동생에 대해 생각한다. 형을 생각하는 것은 내가 힘들어서이고, 여동생을 생각하는 것은 엄마가 힘들기 때문이다. 해방 일지를 보며, 염창희가 구 씨를 형이라 부르는 장면이 내게 덜컥 덜컥 소리를 내었던 것은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거다. 무언가 해 줄 수 있길 기대한다기보단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중학교 1학년 때, 엄마가 동생 낳을까? 이름을 별똥이로 방 별똥. 별을 봐야 뽕을 따니까. 그러면 방별뽕 아닌가? 했을 때, 정말 동생이 생겼다면 지금 쯤 고등학생이 되어있을 여동생이 그립다. 있지도 않은 형이 그립고. 괜히 빵집으로 들어가는 가족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든다.
형 / 심보선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형은 분명 선량한 사람이 됐을 거야.
나만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을 테고
나보다 어머니를 잘 위로해 줬을 거야.
당연히 식구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잠들었겠지.
문들을 다 닫고.
불들을 다 끄고.
형한테는 뭐든 다 고백했을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사는 게 너무나 무섭다고.
죽고 싶다고.
사실 형이 우리 중에 제일 슬펐을 텐데.
그래도 형은 시인은 안 됐을 거야.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이야.
이것 봐, 지금 나는 형을 떠올리며 시를 쓰고 있잖아.
그런데 형이 이 시를 봤다면 뭐라고 할까?
너무 감상적이라고 할까?
질문이 지나치게 많다고 할까?
아마도 그냥 말없이 웃었겠지.
아까 그 신부님처럼.
시가 아니더라도 난 자주 형을 생각해.
형이 읽지 않았던 책들을 읽고
형이 가지 않았던 곳들을 가고
형이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형이 하지 않았던 사랑을 해.
형 몫까지 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끔
내가 나보다 두 살 더 늙은 것처럼 느껴져.
그럼 죽을 땐 두 해 빨리 죽는 거라고 느낄까?
아니면 두 해 늦게 죽는 거라고 느낄까?
그건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그런데 형은 정말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사실 모르는 일이지.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지.
불행이라는 건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말이야.
만약 그랬다면 내가 형보다 더 슬픈 사람이 되고
형은 감옥에서 시를 썼을까?
그것도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수두룩했는데
결국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네.
형 때문에 나는 혼자 너무 많은 생각에 빠지는 사람이 됐어.
이것 봐. 지금 나는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시를 쓰고 있잖아.
문들도 다 열어두고.
불들도 다 켜놓고.
형,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왜 형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왜 형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거야?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형,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