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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스썸머 Aug 05. 2019

사랑의 단상 / 롤랑 바르트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일지도요.

얼마 전 누가 나한테 그랬는데.. 사랑학으로 논문 쓰시냐고, 거의 포닥급이랬나.

노노 아직 아닙니다. 개설만 된다면 지도교수는 롤랑 바르트 선생으로, 최종 꿈은 테뉴어입니다.


나는 '사랑'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다. '연애/연인'과는 조금 다른 결인데..

물론 연인과의 연애를 전제로 이 감정이 생겨났다 또 없어지고 다시 생겨나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그와의 관계에서 비롯한 내 감정과 상념들이 내게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달까. (호기심 많은) 이기적 유전자인 까닭이다.


요즘 뭐 읽냐는 질문에 "로.. 롤랑 바르트를 좀 읽고 있는데."라는 답을 한지 한 달쯤.

몇 년 전에 사실 큰 감흥 없이 읽었던 <사랑에 대하여/장석주>를 몇 달 전 출근길에 다시 읽는데 이번에는 왜 그렇게 귀퉁이를 접어둬야 할 페이지가 많은지. 그것들은 대개 바르트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었다.

해서 마치 인문대 교양과목 참고서적 1 같은 제목과 커버의 이 책을 한 달쯤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소나기 쏟아지는 토요일 오후, 남김없이 읽어버리고는 또또 누가 보면 논문 쓰냐고 놀리기 좋게 노트북을 열고 타이핑을 시작해본다.



p.32 부재하는 이

가끔 부재를 잘 견디어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소중한 이'의 떠남을 감수하는 '모든 사람'의 대열에 끼게 되는 것이다. 일찍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있도록 훈련된 그 일들이기에 나는 능숙하게 복종한다. 이 잘 견디어낸 부재, 그것은 망각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가끔 망각하지 않는 연인은 지나침, 피로, 기억의 긴장으로 죽어간다(베르테르처럼).


p.56 사랑을 사랑하는 것

나는 그이/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어떤 우발적인 상처(이를테면 질투의 상념 같은 것)가 나를 위협하면, 이내 나는 그 상처를 사랑의 감정의 현란한 추상성 안으로 흡수하여, 부재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을 욕망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렇지만 또 그 사람이 이처럼 작아지고 축소되어, 그 자신이 야기한 감정에서조차 제외되는 것을 보면서 이내 괴로워한다. 그리하여 그를 버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비난한다. 하나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p.65 기다림

무대는 어느 찻집 안.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고, 그래서 난 기다린다. 서막에서 유일한 배우인 나는 그 사람의 늦어짐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이 서막은 하나의 충동적인 생각으로 막을 내린다. 즉 나는 '걱정하기로' 결심하고 기다림의 고뇌를 터뜨린다. 그러면 제1막이 시작된다. 그것은 일련의 가정으로 채워진다. 만날 시간이나 장소에 어떤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닐까? 제2막은 분노의 막이다. 나는 부재하는 그 사람을 향해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그래도 그이/그녀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3막에서의 나는 버려짐의 고뇌라는 아주 순수한 고뇌에 이른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진다. 그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장례의 폭발. 나는 마음속에서 창백해진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연극이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p.72 검은 안경

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바로 거기에 진짜 영웅적인 가치가 있다. "고매한 영혼들은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주변에 퍼뜨려서는 안 된다."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인 파즈 대위는 가장 친한 친구의 부인을 죽도록 사랑하나, 그 사실을 완벽하게 은폐하기 위해 마치 자신에게 정부가 있는 것처럼 꾸며댄다. 그렇지만 정념을(다만 그 지나침을) 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이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야만 한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좀 아세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인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동시에 알려져야 하고, 또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것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p.75 "모든 안착한 사람들"

베르테르는 안착하고 싶어 한다. "내가 그녀의 남편이라면! 오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이여, 제게 만약 그런 지복을 내려준다면, 당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로 일생을 바치겠나이다 등등." 베르테르는 이미 알베르트가 차지한 그 자리를 원한다. 그는 시스템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시스템이란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자기 자리(비록 그 자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를 차지하는 한 전체이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안착한 사람들을 왜 나는 부러워하는 걸까? 그들을 보면서 나는 무엇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은 '꿈'이나 '목가적인 사랑' '결합' 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하나의 구조를 바라고 원할 뿐이다.

안착하고자 하는 것은 평생 동안 온순하게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얻고자 함이다.


p93. "나는 이해하고 싶다"

나는 사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실상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지만, 사랑 안에 있는 나는 그것의 실존은 보지만 본질은 보지 못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사랑)은 내가 말하기 위해 사용하는 질료 그 자체이다(연인의 담론). 물론 성찰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내 이미지를 되삭이는 일에만 사로잡혀 반사 작용에 까진 이르지 못한다.


 p.103 "어쩌다 내 손가락이 ~할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의 접촉은 이렇듯 모두 대답의 문제를 야기하며, 이때 대답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살갗이다. (손을 잡는다는 것 - 수많은 소설의 얘깃거리가 되어온- 손바닥 안에서의 그 미세한 움직임, 비키지 않는 무릎,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소파의 등받이를 따라 늘어뜨려진 팔, 그 위로 차츰 다가와 기대는 그의 머리. 그것은 미묘하고도 은밀한 기호들의 천국이다. 감각의 축제가 아닌, 의미의 축제와도 같은 그 어떤 것.)

*비키지 않는 무릎: 연애가 시작되는 순간. 팽팽했던 마음이 ‘묵시적 동의’하기로 대담하게 나아가는 순간.


p.110 대담

선언 DECLARATION. 사랑하는 사람이 감정을 억제하고,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그의 사랑, 자신, 그들 자신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성향. 선언은 사랑의 고백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의 형태(수없이 논평되어 온)에 관계된다.

*일전에 선배가 말했지, 어른의 연애란 고백이 아니라 유혹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p.139 소설/드라마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애 소설을 스스로는 쓸 수 없다. 다만 아주 오래된 문학 형식만이 그가 얘기하지 않고 낭송조로 읊조리는 이 사건을 수용할 수 있다.


p.146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글로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해 글을 쓸지도 모르는 이 나는 누구일까? 글쓰기 안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글쓰기는 그를 움츠리게 하며,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자신의 '진지함'을 매장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언제나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상기할 것). 글쓰기가 요구하는 것, 그리고 모든 연인이 아픔 없이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상상계를 '조금' 희생해야 한다는,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 자신의 언어를 통해 약간의 현실적인 것의 승화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p.167 페이딩

나는 이미지를 변질시키러 오는 것은 모두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의 피로를 두려워한다. 피로란 경쟁 대상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이다. 어떻게 피로에 대항해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연애 소설에서도 나는 작중 인물이 피로하다는 걸 읽은 적이 없다. 피로에 대해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는 나는 블랑쇼를 기다려야 했다.)

*연인의 입에서 피곤해서 못 만나겠다는 말이 나올 때, 헤어질 때라고 생각한다. 이미 피로에 져버린 사랑이다.


p.185 푸른 연미복과 노란 조끼

옷 HABIT.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만남 때에 입었던 옷이나, 사랑하는 이를 유혹할 목적으로 입는 옷 때문에 야기되거나 부양되는 모든 감정적 동요.

"내가 로테와 처음 춤을 추었을 때 입었던 그 단순한 푸른 연미복을 벗어 버릴 결심을 하는 데는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네. 결국 그 옷은 아주 낡아 버렸다네. 그래서 전과 똑같은 옷을 한 벌 맞추긴 하였지만.." 베르테르는 그 옷을 입은 채 땅속에 묻히기를 원했고, 또 사람들이 자기 방에서 죽어가는 그를 발견했을 때도 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p.196 알 수 없는 것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대상 때문에 자신을 소모하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행위이다. 그 사람을 하나의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만든다는 것은 곧 그를 신으로 축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가 던지는 질문을 결코 풀어헤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따라서 내게 남은 일이라곤 내 무지를 진실로 바꾸는 일뿐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 사람을 정의하려는 대신("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당신을 알려고 하는 이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p.204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

만남의 경이로운 순간이 지나가면, 사랑의 상황은 곧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의 인내심은 그 출발부터 자체 부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기다림이나 자제력, 속임수,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격심해도 닳지 않는 그런 불행이다. 일련의 동요, 그 반복에 용감하게도(?) 종지부를 찍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을 의미하는 반복적인(희극적인) 몸짓.


p.219 사랑해요

"난 널 사랑해. - 저도 그래요(Moi aussi)."

'저도 그래요'는 완전한 대답이 아니다. 완전한 것은 형식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발화된 것을 문자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함이 있다. 생-프뢰는 윌리의 사랑을 여러 번 오만하게 거부하고 나서야,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정신 착란적인 진실은 어떤 논리적인 추론이나,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서 오는 것이 아닌 뜻밖의 깨어남, 전환에 의해 오는 것이다.


p.230 사랑의 편지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따르고 있다. 1. 당신을 생각하는 일이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2. 나는 여기 사교적인 분위기 속에 있지만 당신이 없어 무척 외롭다. 3. 당신을 닮은 사람을 만나 당신 얘기를 할 수 있다. 4. 나는 우리가 결합되도록 기도를 하고 있다. 단 하나의 정보가 주제 음악처럼 여러 가지로 변형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당신을 생각하오(je pense à vous)이다.

'누군가를 생각한다'란 무슨 뜻일까? 누군가를 망각했고(망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에), 그리하여 자주 그 망각에서 깨어난다는 뜻일까? 많은 것들이 연상 작용에 의해 당신을 내 담론 안으로 끌어들인다.


p.240 "난 끔찍해!"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피스트인 리시아스와 초기의 소크라테스의 담화는 둘 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게는 견디기 힘든 존재(그 중압감 때문에)라는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견디기 힘든 이유들이 나열된다. 즉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의 대상의 눈에 자기보다 우월하게 보이거나 동등한 자가 나타나면 참지 못해 모든 경쟁자를 깎아내리려고 애쓴다. 그는 사랑의 대상을 다른 많은 관계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교활한 계략을 써서 연인을 무지 속으로 몰아넣고,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p.244 대답 없음

침묵 MUTISME.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보내는 말(편지나 담론)에 대해 사랑하는 이가 대답하지 않거나, 혹은 인색하게 대답하면 괴로워한다.

'회피하는 듯한 말듣기'는 나를 비열한 상념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를 유혹하려고, 즐겁게 해 주려고 미칠 듯이 애를 쓰는 나는, 그에게 말을 하면서 재치의 보물들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보물들이 무관심하게 받아들여지다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내 '재능'을 낭비한 셈이 아닌가. 모든 감정적인 흥분, 학설, 지식, 부드러움 등, 내 자아의 모든 광채가 무기력한 공간 속으로 희미해져 가고 무디어져 간다.


p.273 황홀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최면이다. 나는 한 이미지에 매혹된다. 마치 소크라테스에 의해 메논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흔들리고, 충전되고, 얼떨떨해지고, 뒤집히고, '마비'된다. 사랑의 대상, 사로잡는 이미지, 한 출현에 의해 개종한 사람의 모델이 되는 이야기.

마차에서 내린 베르테르가 처음 본 로테의 모습은 자기 집 문에 둘러싸인 모습이었다(아이들에게 버터 바른 빵을 잘라 주는 유명한 장면으로 많은 논평의 대상이 되어온). 이렇듯 처음 우리는 하나의 정경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첫눈에 반하기 위해서는(운명과도 같은 그 무엇에 휩싸여 넋을 잃는, 그리하여 내 책임이 아닌) 갑작스러움의 기호 자체가 필요하며, 또 이런 모든 대상의 배열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정경이기 때문이다.


p.284 "그때 하늘은 얼마나 푸르렀던가"

만남의 순간마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한다. 당신 이거 좋아하세요? 어쩜 저도 그런데요! 저건 좋아하지 않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등등. 부바르와 페퀴셰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들은 공동의 취향을 늘어놓으며 감탄해 마지않는다. 바로 이것이 의심할 여지없는 진짜 사랑의 장면이다. 만남은 사랑하는 사람 위에(이미 매혹된) 초자연적인 우연이라는 도취감을 투사한다. 사랑은 일종의 주사위 던지기와도 같은 것이다(디오니소스적인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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