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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스썸머 Jan 03. 2021

3일차) 올해 잘한 일

버티기의 기술

AM9:30, 아침 출근길에 오늘 주제를 보고 몇 가지 잘한 일들이 떠올랐다. 1일차 글쓰기에 등장했던 '어쩌다' 시작해서 꾸준히 하고 있는 북클럽 운영이라던가, 운동이라던가.

PM10:00, 오늘따라 일이 너무 많아 아직 한 끼도 제대로 못 먹고 겨우 퇴근하는 지하철 안. 울컥한 심정 조금 담아 올해 '가장' 잘한 일은 연초에 옮긴 새 부서에서 연말까지 버텨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입사 이후 처음 하는 부서이동도 아니었지만 올해 이 곳으로의 이동은 내게도 주변 동료들에게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전에 몸담고 있던 조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주40시간 근무에 특화되다 못해 근무시간을 '채우는 것이 일'이라고 할 정도로 워라밸이 보장되는 곳. 누구나 고생을 치하하는 최전방 부대에 있지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 가만히만 있어도 부대의 성과(급)를 나눠가질 수 있는 곳. 더군다나 그 곳에서 세번째 해를 맞은 내게는 언제 무슨 질문이 들어와도 적당히 대답할 수 있는 '짬밥'이 생기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썸머야, ***팀장님이 함께 일할 주니어를 찾는데 네 추천을 여러군데에서 받으셨대. 어떻게 생각해?"

사내 잡포스팅 제도가 있는데 이렇게 물밑에서의 헤드헌팅은 FA대어들에게나 있는 일 아니었던가. 어머,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업무강도가 높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에이, 주50시간만 안 넘기면 되지. 직속 임원이 보통 까다로운게 아니라는 소문도 들었지만 에이, 일개 대리가 대면보고 할 일이 얼마나 되려고. 아무도 휴가를 안(못)쓰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었을 땐 이미 사내 발령문이 뜨고 난 이후였다.(그럼 그렇지, 대어가 아닌 내가 당한 것은 헤드헌팅이 아니라 피싱이었던 것이다.)

소문에는 과연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세 번의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중간중간 재택근무가 있긴 했지만) 막차를 놓쳐 택시로 퇴근하는 일이 부지기수, 여름휴가 첫날 강원도 산속 깊은 펜션에서 ZOOM을 켜고 임원과 1시간이 넘도록 회의하던 날도 모두 실화였다. 그런데 이게 정말 올해 잘한 일이냐고?

어느덧 회사에서 7년차가 되었다. 간절함과 치열함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특출나지 않을 바엔 적당히/대충 하자'가 싹튼지도 2-3년쯤 되었을까. 요즘 운동이랍시고 등산과 테니스를 조금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오르고 세게 치는 것' 말고 또 한 가지 필요한 건 바로 '버티기의 기술' 아닐까.

일단 내년까지는 말랑해진 일근육을 버티는 힘으로 다시 키워볼 생각이다. 그러다 이곳에서도 짬밥이 생기면 언젠가 재밌게 읽었던 책 제목처럼 '힘빼기의 기술'을 써먹을 수 있겠지.


오늘 20분 짜리 점심. 그래도 버티려면 밥은 잘 먹어야 한다. 내일 점심은 거하게 먹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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