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스테파니 초이스 연말 시리즈
안녕하세요? 12월이 가까워오는 2021년의 11월 막바지입니다.
오늘은 런던의 매력적인 곳이 마치 같이 둘러보시는 것을 상상하며 써봤습니다.
나중에 이곳들, 같이 가셔서 돌아봐도 좋겠죠.
제가 처음 런던에 발을 디딘 것은 1999년이었고, 그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내셔널 갤러리였습니다.
국립미술관인 이 내셔널 갤러리의 시작은 의회였습니다.
1824년, 영국 하원에서 한 은행가의 미술 소장품 콜랙션을 구매하기로 결정합니다.
한국으로 하자면 순조 때입니다. 그리고,
폴몰 100 번가에 그림들을 걸고
‘내셔널 갤러리”라 부릅니다.
하지만 품위가 결여되었다고 불만을 샀습니다. 18세기에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프랑스 루브르에 박물관과 비교하면 그렇죠?
그래서 대영제국에 걸맞은 격조 높은 박물관을
오늘날의 트라팔가 광장에 건립하기로 결정합니다.
위치는 귀족들은 런던 서쪽에서 마차를 타고 올 수 있고, 평민들도 런던 동쪽에서 걸어서 접근이 용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사실 당시는 건물의 반은 학교로, 반은 컬렉션 전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컬랙션이 커지면서, 그 학교는 나중에 이전을 하고 전체를 다 전시에 사용하게됍니다.
하지만 국가 소장품은 점점 늘어납니다.
때마침 2차 세계대전 때, 미술관의 왼쪽 건물이 폭격으로 파괴되어, 그 자리가 비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슈퍼마켓 체인 중 하나인 세인즈베리를 만든 세인즈버리 경의 후원으로 해서 새로운 건물이 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현대적 건물을 세인즈베링 윙이라고 합니다. 이 화려한 칼럼 (column)을 현대화해서 이어지지만, 다르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습관적으로, 인상파를 보러 갈 때에도 이 세인즈베링 윙 입구로 입장합니다. 컬렉션의 가장 이른 시기인, 14세기 - 15세기 종교화들로 가득한, 즉 암흑기에서 르네상스로 전환하는 그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은 겉과 다르게 마치 교회당처럼 색을 지었습니다. 원래 르네상스까지만 하더라도 그림은 늘 종교화였죠. 그리고 종교 혁명이 일어나며, 이 그림들은 성당을 나와 조각나서 팔립니다. 다시 이 그림을 사드리면서, 다시 미술관은 성당의 모습을 하게 되죠. 교회들은 비어서 이제 콘서트장과 전시에 사용되는 거와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유럽에서 상업이 발달하면서, 그림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상인 부르주아급이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머리 아픈 종교화나 신화가 소재가 아닌 쉬운 그림들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정물화에서도 늘 사람은 죽는다는 메시지 - 모멘토 모리 - 가 등장합니다.
현실을 비판하기 시작 그림이 등장한 것은 약 400년 후.
윌리암 호가스가 그린 내셔널 갤러리의 1743년 시리즈, “메리쥐 알 라 모드"라고 해도 좋습니다. 한국은 영조 때입니다. 귀족 정치를 비판하기 위해 그려진 이 그림은 당시 판화로 제작하여 팔았습니다.
요즘이라고 하면 재벌가를 조롱하는 텔레비전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시작부터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왼쪽에 결혼을 약속한 커플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남자의 목을 자세히 보시면, 검은 스티커 같은 거로 가린 흔적이 있는데, 당시 성병을 가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미 남자 얼굴에는 방탕한 생활을 한 흔적이 있고, 여자는 등을 돌린 채 혼수품을 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사돈 관계가 된 양가의 부친들 중 한 명은 맞은편에 앉은 사돈 양반인 공작이 건넨 “marriage settlement”를 보고 있고 공작은 family tree 즉 족보를 내세우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는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돈으로 이미 빌딩이 올라가는 광경이 보입니다이의 최후는 한번 가서 보시기 바래요.
아까 내셔널 갤러리가 처음 생겼을 때 반이 학교였다라고 했습니다. 그 학교가 로열 아카데미입니다. 소장품이 많아지자 학교는 지금의 벌링턴 가든의 위치로 이사합니다. 지금도 학교의 역할과 전사장의 역할을 잘하고 있습니다.
매년 열리는 써머 익스비션 (Summer Exhibitioon)은 1869년부터 열린 공모 전시로 신청을 받고, 판매를 하는 가장 큰 사교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국립 미술관에는 어느 시대까지의 컬렉션이 있을까요?
1900년도입니다.
그리고 1900년도부터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있습니다. 테이트 모던을 짓게 되면서, 내셔널 갤러리의 관장님과 테이트 모던 관장님이었던 니콜라스 세로타가 1900년도 전 후로 국립미술관 소장품을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편의상 그렇게 나눴지만, 이어지는 미술사조가 떨어져 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세잔의 그림은 내셔널 갤러리에, 이에 큰 영향을 받은 피카소의 1900년대 초 그림과 큐비즘의 시작은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있습니다.
테이트 모던은 1932년에 큰 콜랙션을 기증했던 테이트 & 라일로부터 시작됐지만 역시 국립미술관입니다. 테이트 모던은 당시 사용하지 않던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했는데요, 이때 정말 난다 긴가 하는 건축가들이 다 꼼빼라고 하는 컴프티션에 다 신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건축가들은 시그네쳐 스타일로 신청을 한 거에 비해 당시 무명에 가까운 헤르조그 뮤론은 화력발전소를 그대로 둔 채, 안을 현대미술에 어울리는 장소로 바꾸고, 유리 층을 올려 무거워 보이는 미술관을 살짝 바꾸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지금은 건축 스타가 됐죠.
그렇다면 화력발전소의 원래 건축가는 누구일까요?
런던 세이트 폴 성당 맞은편에 있는 발전소를 지은 사람은 길버트 스콧 경입니다. 1963년 길버트 스콧은 또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빨간 전화박스를 디자인 한 사람입니다. 뭔가 사다리처럼 길게 이어져있는 직사각형 유리가 겹치죠.
그럼 길버트 스콧의 영향을 준 이는 누굴까요?
런던 홀본 역 뒤에 링컨쓰 인이란 스퀘어가 있습니다. 그곳에 정말 보물 상자 같은 작은 박물관이 있는데, 이가 소안 뮤지엄입니다. 존 소안 건축가가 살던 집인데요, 소안은 뱅크 오브 잉글랜드를 지었던 유명 건축가로 집을 평생 바꾸며 엔티크와 건축 모델 등 여럿을 전시하며 아까 말씀드린 로열 아카데미에서 건축을 가리켰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은 아주 드라마틱하게 끝납니다. 소안은 명성을 더해하고, 콜랙션은 점점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이를 뮤지엄으로 바꾸려는 계획까지 세우는데, 이를 비판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신문에 "쏘안은 자신의 (무덤 (mausoleum)을 짓고 있다, "라고 강하게 쓴 자는 익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바로 소안 아들임을 어머니는 알았고, 그녀는 화병으로 앓다가 죽음에 이릅니다. 소안은 이를 깨닫고 아들들과 의절을 하고, 그의 엄청난 컬렉션은 나라에게 기증됍니다.
이곳에 가면 멋진 오페라로 변신한 <방탕자의 최후>의 오리지널 회화가 있습니다. 시리즈 원작자는 누굴까요? 네 윌리암 호가스입니다.
이 오페라는 미국에 망명 간 스트라빈스키가 우연히 <방탕자의 최후> 판화를 보고 오페라로 만들었고, 위의 모습은 이를 데이비드 호크니가 다시 무대 디자인했던 장면입니다. 마치 판화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크로스 해칭 (십자) 무늬가 눈에 띄죠.
이렇게 오늘 저랑 같이 둘러본 런던의 여러 곳 어떠신가요. 궁금하신 점 코멘트에 남겨주세요!
https://www.youtube.com/c/CuratorStephanie
김승민 큐레이터 (슬리퍼스 써밋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