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분한 마음들은 나를 울린다.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모를 퇴사를 했다.
인생사만큼이나 복잡한 회사 잔혹사로 인해 경력이 이상하게 꼬였다.
가장 최근 다녔던 회사는 스타트업계에서 꽤나 인정받고 자리를 잡아나간 곳이었는데, 사실 당시 프리랜서 신분으로 글 쓰는 일에 올인한 상태라 글 쓰는 폼이 90%는 올라와 있었다. 그대로 끌어올린다면 승승장구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어느 회사라도 선뜻 입사할 마음이 없었다. 단지 인정욕 강한 나는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선뜻 나서 두 팔을 걷어붙이는 편이라, 그쪽에서 내가 필요하다고 해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게 급히 결정됐다.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 못해 퇴근하고 남은 시간에 글을 썼지만 온전히 집중하던 때보다는 당연히 폼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은 그마저도 쓰지 못했다.
그 회사를 다니던 1년 6개월 동안 8개월은 월급루팡을 했다. 하던 신사업을 실패로 낙인찍은 회사가 과감히 사업을 접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더 투자하지도 못한 채 정체기인 데다가 주어진 롤도 딱히 없이 재택을 했던 터였다. 성장과 성취가 가장 큰 원동력인 내게 지옥 같고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회사의 방향성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으며, 리더는 문제의식이 없었다. 교통정리를 못했다. 각자의 역량이 분명한 이들은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그런 팀원의 역량은 관심 밖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각자의 역량이 발전하고, 그래야 팀의 효율과 생산성도 같이 높아질 텐데, 밑 빠진 독을 메우는 데만 급급했다. 누수를 메꿀 수만 있다면 체스 말을 아무렇게나 갖다뒀다. 룰이 어긋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 덕에 R&R은 엉망진창이었고, 모든 이들의 커리어가 꼬이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개발자가 디자인을 해야 하고 PD가 CRM 마케팅을 하는 등, 할 수 없는 일인데 해야만 한다는 이유로 일이 주어졌다. 소리 없는 아우성, 총성 없는 전쟁터, 불기둥 없는 지옥이었다. 처음에는 나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갈 찾아 알아서 열심히 했지만, 그마저도 인정받지 못하고 돌아오는 채찍질만 오히려 커졌다. 동기를 잃었다. 복수하듯 수동적인 마인드로 바뀌었다. 아무도 터치를 안 했다. 회사는 그걸 더 원하는 듯했다. 순종, 복종.
솔직히 루팡을 더 하라면 할 수도 있었다. 고분고분하라는 대로 적당히, 루팡 하면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니 손해는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내 발로 나가는 길을 택했다. 나는 아직 할 도전이 더 많고 이루어야 할 것들이 많은데, 월급이란 것 때문에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었다.
결국 위 아 원팀을 외치며 맏언니로서 우리 팀을 하나로 뭉쳤던 내가, 어쩌면 팀장이 해야 할 - 팀원별 정서 관리하고 동기부여를 하는 일 - 을 하던 내가 먼저 gg를 쳤다. 나 살자고 팀원들을 배신했다.
스타트업의 분위기가 다 이런 건지, 내가 인복이 좋은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스타트업에서 겪었던 팀원들은 동료 이상으로 애틋하고 친하다. 주말에도 만나 함께 취미생활을 즐기고 여가를 함께 할 만큼. 보수적이고 수직적인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은 대개 경악하거나, 신기해하거나 둘 중 하나의 리액션을 한다.
퇴사가 정해지기 전부터 팀 내 관심사가 같은 덕메들과 우리 집에서 온라인 콘서트를 보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하필 막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요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막근 날에도 퇴사가 실감 나지 않았다. 그래서 출근 마지막 날, 팀 막내가 하루 종일 펑펑 울며 다 자기 때문인 것 같다는 말에 벼락을 맞은 듯했다. 나의 퇴사는 팀원 중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고통은 그들의 몫이었다. 팀에서 한 명 한 명 떠날 때마다 상실과 무기력, 죄책감이 그들에게 쌓였다. 누구도 주지 않은 독인데, 그 독을 알아서들 나눠 마셨다. 나 또한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그랬기에, 공감하면서도 아무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일요일 우리 집에 모인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회사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떠들썩하게 덕질을 하며 꺄르르 웃었고, 술을 부어라 마셔라 했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 회사 얘기 없이 오로지 우리만의 관심사로 이야기를 채웠다.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같은 취미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만났으니. 우리는 동료 이상이다.
모두 돌아가고 집 정리를 하는데, 막내가 몰래 놓고 간 봉투 꾸러미를 발견했다. 손편지와 작은 선물이 놓여있었다. 그 자리에 눌러앉아 편지를 읽고는 엉엉 울었다. 같이 일하는 동안 즐거웠고 행복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왜 이렇게 나에게 마음을 쓸까. 내가 뭐라고, 이렇게 정을 줄까.
술주정에 가깝게 우는 나를 남자 친구가 끌어안아주며 말했다. 네가 그만큼 정을 줬으니 그들도 너에게 정을 준 거라고. 일방적으로 받았다고 생각 말라고.
나는 여전히 주는 것에만 익숙했기 때문에 받는 게 어색하다. 그이의 마음이 고맙고 미안했다. 부담스러워할까 봐 내색도 하지 않고 자리에 고이 두고 간 봉투가 마음이 쓰였다. 한 자 한 자 진심을 담아 눌러쓴 글씨들이 아팠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내며 내 취향까지 완벽하게 간파해 보내준 소중한 마음이 기어이 나를 울리고 말았다.
사람이 무섭다. 정드는 게 무섭다. 사람과 가까워지고 깊은 관계를 맺는 게 두렵다. 소중한 것들은 기어이 끝이 나고 나를 울리고 마니까. 사회에서 만난 동료들이 이렇게 소중해질 줄이야. 이 나이를 먹고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을 배운다. 우리는 헤어져도 다음 어디선가 더 좋은 곳에서 만나길, 그렇게 믿으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충분히 그럴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 정상에서 다시 만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그날 새벽 다섯 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벌써 그들이 그리워져서.
정을 주고받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