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 소설
90년대에 쓴 서울버전 헝거게임
1.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장면이 눈에 쉽게 그려지면서 술술 읽히는 소설들을 좋아한다. 어려운 소설도 읽는 재미가 있지만 쉬운 소설도 별다른 생각 하지 않으면서 읽는 맛이 있다. 거기에 개연성과 작품성이 같이 있으면 제일 좋다. 어려워야 좋은 소설이 아니라 어려워도 끈덕지게 읽어내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드는 소설이나 전혀 어렵지 않지만 탄탄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으면서 읽고 나면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게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2. 그런 측면에서 반은 좋은 소설이었다. 왜냐면 쉽게 읽히기 떄문. 그리고 소재도 한국 영화에서 지겹도록 보이는 액션, 느와르, 스릴러 등등을 적절히 버무려 놓기 좋은 소재다. 등장인물들도 흔히 봤던 캐릭터들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타일도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작위적인 형식을 끼워넣는 등의 것은 없고 읽는대로 읽히도록 써 놓아서 걸리는 게 없이 읽힌다.
3. 반대로 말해 반은 별로인 소설이었다. 잘 읽히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내용들이어서 받아들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는 점, 딱 거기까지였다. 술술 읽히면서 적당히 익숙한 듯한 스토리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에 딱 포인트가 될 만한 뭔가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 것 같은데, 없다.
4. 스토리는 말하자면 한국판 헝거게임이다. 돈 없고 힘들게 사는 사회 하류인생들이 인생역전할 수 있는 게임이 열린다. 여기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지는데, 주인공은 인간적이다. 인간적인 사람들끼리 모여서 체제 전복을 모의하지만 주최측에 발각된다. 여기에 주인공에 감정이입할 수 밖에 없는 개인사가 조미료처럼 여기저기 스며들어 있다. 이만큼만 들어도 웬만한 한국 영화들 중에 하나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정도가 끝인 소설이다.
5. 읽으면서 '좋은 소설이라기엔 조금 부족한데, 보통 이런 소설은 좀 각색해서 영화화하면 괜찮겠다.' 싶은 경우가 있는데 이 소설은 영화보다는 게임 시나리오로 쓰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 곳곳이 배경으로 나오고, 요즘 유행하는 배틀그라운드 스타일 설정에, 등장인물들도 남녀에 해커출신 등 캐릭터가 다양하고, 주인공이 미션들을 클리어 해나가면서 성장하는 설정도 게임으로 쓰기에 딱 괜찮다고 생각했다. 물론 무대 배경이 서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특별한 점은 없지만 말이다.
6. 생각해보니 한 방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이유가 아마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인물들의 감정들과 그것을 결말로 풀어가는 과정이 좀 식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에는 권선징악, 가족애, 그리고 악역이었던 인물은 더 거대한 세력의 수하였을 뿐이고 여전이 악은 존재하고 있다는 설정 등등... 만화도 아니고 식상한 건 사실이다. 제목이 살육도시인데, 좀 용두사미 느낌.
7.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다 읽었는데, 읽고 나서 찾아보니 저자가 ‘공공의적’과 ‘이중간첩’을 쓴 영화 시나리오 작가셨다. 내가 누굴 평가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냥 내 감상을 적는 거니까 얘기하자면, 그걸 보고 아 그래서 그랬구나 싶었다. 디스는 아니고, 좋은 소설을 쓴다는 게 정말 힘들다는 것을 한 번 더 느끼게 된다. 오랫동안 글 쓰는 것에 공을 들이고 스토리를 짜는 것으로 커리어를 쌓아오셨을 분인데, 이런 스토리와 구성이라니, 좋은 소설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그냥 말은 쉬우니까 하는 소리임.
8. 읽으시려는 분은 이 책보다는 차라리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다. 신세계나 뭐 여타 한국 느와르물들을 다 보셨다면, 헝거게임도 보고 배틀로얄도 보고, 시간 남으면 20세기 소년 만화책이라도 보고, 그런거 다 보고 시간 남으면 책 말고 산책도 좀 하시고 친구도 좀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 잠도 안오고 할게 정 없으시다면, 공공의 적 1편 딱 보고 주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