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웃음처럼 차고 아픈 가을날
"의례적인 가을 상담이 아니라면 수지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목련 꽃차의 알싸한 맛을 느끼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수지가 집에서는 전혀 학교 얘기를 하지 않던가요?"
그의 표정은 지나치게 진지했고 목소리는 낮았다.
"네 워낙 말수가 없는 애이기도 하고 작년 이후론 거의 얘기를 하지 않는 편이지요."
"선혜 씨가 놀랄까 봐 전화하는 게 쉽지 만은 않았습니다. 수지가 집단 괴롭힘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차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무슨?"
"저희 반 학부모에게 신고가 들어왔는데 수지를 비롯한 몇 명인가가 안 좋은 일을 겪은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수지가 가장 많이 피해를 본 학생이라고 증거자료들이 올라와서....."
나는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늘 불어있는 수지의 우울한 얼굴이 갑자기 떠올라서였다. 나는 그 애를 위로하기는 커녕 그 얼굴을 보면 덩달아 우울해 하거나 화를 내곤 했었다.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지는 조용하고 착한 아이인데 늘 혼자인 것이 아이들의 표적이 된 것 같네요. 어떻게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죄송합니다. 제가 단속을 잘 했어야 했는데.......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학교 폭력 위원회에도 회부할 것이고 가해 부모와 자녀들의 사과도 받아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지 어머님, 선혜 씨는 저를 믿고 맡겨 주시면......"
아이를 가진 사람은 모두 약자인 것이다. 나는 부모가 될 자격이 애초에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또 무력하게 눈물이 나 흘리는 것뿐이었다.
"선혜 씨 죄송합니다."
나는 말 못 할 자괴감에 견딜 수가 없었고 그 모습을 그에게 보이기도 싫었다. 아이와의 소통의 끈을 놓아버린 결과에 나는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일단 아이에게 가보고 싶네요"
나는 그를 뒤로 한 채 교실을 뛰쳐나왔다. 세상에 한 생명을 내놓는 일이 또 지키는 일이 내게는 벅찼던 것이다. 어쩌면 혼자서 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내가 아니었던가. 수지야 엄마가 미안해. 모두 엄마 탓인 것만 같아. 내가 널 이렇게 만든 거야. 아이들에게 잡힐 수 있는 꼬투리만 꼬투리는 모두 엄마가 만든 거야.
그 후 학교에선 가해 부모와 피해 부모가 함께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고 공개 사과를 하는 자리도 마련되었다. 나는 멍한 채로 그 폭풍 같은 시간들을 견뎌냈다. 김영우 선생과 눈을 마주치는 일도 그 교실에 들어가는 일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무더웠던 여름날 하루, 그의 죽은 아들 얘기와 나의 길고 긴 울음. 그리고 그의 따뜻하고 섬세했던 다정한 손길. 그 짧았던 여름날 이후 나는 많은 시간 그를 떠올리곤 했었다. 내 슬픔의 작은 조각을 가져간 것처럼 내게 찾아온 작은 설렘도 함께 나눠가졌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수지의 일을 겪으며 나는 백일몽이나 꾸는 소녀가 아니라 엄마이자, 학부모이자, 보호자여햐만 하는 나의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쓴웃음처럼 차고 아픈 가을날들이었다.